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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수 염 고 래/공 부

욕망과 해탈의 심리학; 불교

by 두치고 2014. 1. 1.

제9강 공(空)과 마음



- 불교의 역사: 붇다->소승불교(작은 수레)->중관불교->유식불교(대승불교;중관+유식/큰수레)

- 현장(삼장법사)의 인도 유학 이후 성유식론 펼쳐냄. 이 속에 유십 30송(인도의 가장 뛰어난 10명의 주석가)



1. 가는 자는 가지 않는다.

◇ 가는 자는 가지 않는다. (가는 자는 공하다) 가는 자가 아닌 것도 가지 않는다.
그리고 가는 운동도 아니고 가는 자가 아닌, 제3의 것이 가는 것인가? [MS2.8 중론 2장 8번째 시]

= 가는 자는 간다는 표현은 거짓이다./ 번개가 친다. 번개가 안친다. 이 때 번개가 실체로 존재 한다. 우리의 언어의 습관적 사용 때문에 우리의 착각이 생긴다고 니체는 이야기 함.  


◇ 가는 자가 간다고 하면 두 개의 가는 운동이 있다는 잘못을 범하게 된다.
가는 자를 성립시키는 가는 운동과 가는 자가 간다고 할 때의 가는 운동이다. [MS2.9 중론 2장 9번째 시]

- 불교는 고통의 치료학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 열반() : 고통의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고 그것을 제거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고통의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최종적으로 고통이 없는 마음 상태, 즉 열반()를 달성할 수 있다.
- 불교에 따르면 고통은 집착으로부터 일어나는 데, 집착은 세상에 실체, 즉 불변하는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는 잘못된 생각으로부터 발생한다.


2. 나가르주나

-자신의 주저 「중론(中論; )」에서 나가르주나( 龍樹, 150?-250?)는 불변하는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즉 모든 것이 공(空)하다는 생각을 체계적으로 표명한 철학자였다. 보통 불교에서는 불변하는 실체의 자기동일성에 대해 자성(自性)이라는 전문 용어를 사용한다. 그래서 보통 공(空)은 무자성(無自性)으로 정의되는 것이다.



3. 공(空)과 중도의 의미

◇ 있음에 집착하면 상견에 떨어지고, 없음에 집착하면 단견에 빠진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있음이나 없음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MS15.10]

◇ 자성으로 존재하는 것이 소멸되지 않는다고 하면 상견에 빠지고,
과거에는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고 하면 단견에 떨어지게 된다.[MS15.11]

◇ 인연(因緣)으로 생겨난 모든 것을 우리는 공(空)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임시로 시설된 것[假名]으로 이것은 또한 중도이다.[MS24.18]

◇ 어떤 것이든 연기적으로 성립하지 않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공하지 않은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MS24.19]
- 나가르주나에 따르면 형이상학적 사유는 극복될 대상이었다.
- 모든 형이상학은 불변하는 실체를 가정하고, 결국 우리를 집착으로 이끈다.
- 형이상학은 크게 두 가지 경향으로 나뉠 수 있다.
불변하는 실체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상견(常見), 불변하는 실체가 존재하지만 그의 모든 작용은 우발적이라고 주장하는 단견(斷見)이다. 전자가 있음을 강조하는 영원론이라면, 후자는 없음을 강조하는 허무주의라고 할 수 있다.


4.인중유과론과 인중무과론

- 인도철학 전통에서는 상견은 인중유과론(因中有果論)으로, 그리고 단견은 인중무과론(因中無果論)으로 이해된다. 다시 말해 상견이 원인 속에 그 결과가 미리 내재하고 있다는 입장이라면, 단견은 원인 속에는 그 결과가 미리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 나가르주나는 이 두 입장을 모두 극복해야 중도(中道)에 이를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결국 중도란 있음을 강조하는 상견과 없음을 강조하는 단견을 동시에 극복해야만 드러날 수 있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제10강 유식불교

1. 중변분별론(中邊分別論; )

◇ ‘거짓된 상상( 虛妄分別)’은 존재한다.
그 안에는 ‘짝(Dvaya)’이 존하지 않는다.
여기에 공( 空)은 존재하고,
그리고 이것 안에도 그것은 존재한다.[MVK Ⅰ.2]

[바수반두 주석] 여기서 <거짓된 상상>이란 아는 대상과 아는 주체 사이의 구별을 의미한다. <짝>은 아는 대상과 아는 주체이다. <공>은 아는 대상과 아는 주체라는 형식을 결여하고 있는 ‘거짓된 상상’을 의미한다. 심지어 이것[=공]에서도 그것, 즉 <거짓된 상상>이 존재한다.
- 보통 나가르주나의 중관불교가 실체가 없음을 강조하고 유식불교는 의식[識; 표상]이 있음을 강조하기 때문에, 전자는 무론(無論)으로 후자는 유론(有論)으로 이야기된다.

- 「중변분별론(中邊分別論; )」
마이트레야(彌勒; Maitreya, 270?-350)가 지었고 바수반두가 주석을 붙인 「중변분별론(中邊分別論; )」은 매우 중요한 텍스트이다. 여기서 ‘가운데’를 의미하는 중(中)은 중도를 말하고 ‘가장자리’를 의미하는 변(邊)은 단견과 상견과 같은 치우친 견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텍스트는 ‘중도와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하려는 논서’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유식불교와 중관불교 사이의 연속성을 확인하게 된다.

- ‘거짓된 상상’, 즉 허망분별은 주체와 대상이란 이분법을 허구적으로 구성해낸다.
- 바수반두는 이것이 모든 집착의 기원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나는 나고, 대상은 대상이다. 이런 생각으로부터 나는 나로서 영원하고, 대상은 대상으로서 영원하다는 집착이 가능해진다.
- 유식불교는 진정한 의미에서는 주체와 대상이란 짝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이것을 바수반두는 이라고 이야기한다.
- 주체와 대상이란 이분법으로 세계를 보는 것도, 혹은 주체와 대상이란 이분법이 부재한 상태로 세계를 보는 것도 모두 우리 마음에서 가능한 양태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바수반두는 공으로 보는 것도 여전히 ‘거짓된 상상’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던 것이다.



2. 유식불교에서의 중도의 의미

◇ 공(空)도 아니고 불공(不空) 아니다.
이것은 모든 것을 설명하는데,
왜냐하면 있고, 있지 않고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중도(中道)의 길이다. [MVK Ⅰ.3]


[바수반두 주석] 한편으로는 공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거짓된 상상이 존재하기 때문에, <공(空)도 아니다.> 또한 아는 대상과 아는 주체라는 짝이 부재하기 때문에 또한 <불공(不空)도 아니다.>(…) 이것이 실제로 중도이다. 왜냐하면 한편으로 <거짓된 상상> 속에는 <공>이 존재하고, 다른 한편으로 <공> 속에도 <거짓된 상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철저하게 공하거나 철저하게 불공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독법은 「반야경()」과 같은 경전들과 부합된다. 「반야경」은 “이런 모든 것들은 공하지도 않고 불공하지도 않다”고 이야기한다.
- “있고, 있지 않고, 있다”는 표현을 바수반두는 이 표현을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즉 이 표현은 “(거짓된 상상이) 있고, (인식 대상과 인식 주체가) 있지 않고, (공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 바수반두의 생각을 이해하려면 그가 상정하고 있는 두 가지 마음 상태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세계를 ‘주체와 대상이란 이분법’으로 보는 마음 상태이고, 다른 하나는 세계를 ‘주체와 대상이란 이분법’이 부재한 상태로 보는, 즉 공으로 보는 마음 상태이다.
- “모든 것은 공하지도 않고 불공하지도 않다”

- 유식불교의 공 개념이 나가르주나의 그것과 달라지는 지점
나가르주나의 공이 단견과 상견을 벗어난 반형이상학적 시선을 상징했다면, 유식불교에서의 공은 단지 어떤 대상을 ‘주체와 대상’이란 이분법으로 보지 않는 마음의 상태를 의미할 뿐이다. 그것은 유식불교가 자신의 논의를 논리적이고 논증적인 이론적 차원이 아니라, 고통에 빠져 있는 인간의 마음 상태에서 진행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유식불교가 중관불교에 비해 실존적이고 수양론적인 특성을 강하게 띠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3.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세 가지 마음의 상태

◇ 상상적인 것, 다른 것에 의존하는 것, 그리고 절대적으로 성취된 것은
각각 대상들, 거짓된 상상, 그리고 짝의 부재를 언급하면서 가르쳐진다. [MVK Ⅰ.6]


[바수반두 주석] <대상>은 <상상된 본성>이고, <거짓된 상상>은 <다른 것에 의존하는 본성>이고, <아는 대상과 아는 주체의 부재>는 <절대적으로 달성된 본성>이다.


[스티라마티 주석] <거짓된 상상>이 아는 대상과 아는 주체라는 이원론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이 이미 이야기되었다. 그렇지만 그것에 그런 이원성 자체가 결여된 것은 아니다. 게다가 같은 <거짓된 상상>은 <다른 것에 의존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원인과 조건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다시 같은 <거짓된 상상>은 <상상된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아는 대상과 아는 주체라는 형식, 즉 <거짓된 상상> 자체 안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형식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또 같은 <거짓된 상상>은 <절대적으로 성취된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아는 대상과 아는 주체라는 이원성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세 가지 본성들은 동일한 <거짓된 상상>에 포함된다. 그래서 <거짓된 상상>을 이야기함으로써 첫 번째로 알려지는 실재, 그 다음에 거부되는 실재, 최종적으로 실현되는 실재가 드러나게 된다.

- 바수반두나 스티라마티(Sthiramati; 安慧, 470?-550?)가 지적한 것처럼 유식불교에서는 인간의 마음이 세 가지 양태를 가질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보통 유식불교 전통에서는 이런 이론을 삼성(三性, )에 대한 이론, 즉 삼성설이라고 부른다.

- 첫 번째는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이란 마음의 상태:두루따져서집착하다
- 두 번째는 의타기성(依他起性, )이란 마음의 상태:다른거에의존하여 일어나는 것
-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원성실성(圓成實性, )이란 마음의 상태:원만하게 이루어지는 것, 완성된 마음

> 어떤 남성에게 매료된다. 그리고 아름다움은 그의 본성에 속하는 것이라고 착각한다. 이것이 변계소집성이다. 그러나 아름다움에 대한 나의 평가는 내게 각인된 사회적 기억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이 의타기성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그를 있는그대로 조우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원성실성이다.




제11강 마음의 계보학

1. 자아와 대상은 의식의 변형물일 뿐이다.

◇ 아트만()과 다르마(dharma)라는 용어들과 관련된 용례들은 다양하다.
그것들은 모두 의식의 변형들을 가리킨다.
의식의 변형은 세 층위로 일어난다.
「유식30송()」1

◇ 세 가지 변형은 ‘숙성하는 의식’, ‘사유하는 의식’, 그리고 ‘구별하는 의식’이다.
「유식30송()」2-전반부
- 「유식30송()」에서 바수반두는 아트만과 다르마, 즉 주체와 대상이란 구분이 기본적으로 의식의 변형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라는 주장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한다.
- 「유식30송」은 주체나 대상의 계보학이라고 명명될 수도 있겠다.

- ‘계보학(genealogy)’이란 어떤 사물이나 사건이 어떻게 발생되었는지, 다시 말해 어떤 계기들의 충돌과 접합으로서 이루어지게 되었는지를 추적하는 방식을 말한다.
- 계보학적 사유 방식은 자명하다고 긍정되는 사안을 일종의 결과로 사유한다는 점에서 해체적이며 동시에 비판적이라고 할 수 있다.

- 바수반두에 따르면 우리가 자명하게 인식하고 있는 대상이나 자각하고 있는 자아란 결국 의식 변화의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
- 바수반두의 ‘의식’
1)가장 심층에 있는 의식이 ‘숙성하는 의식’
2)‘사유하는 의식’,
3)가장 표층에는 ‘구별하는 의식’

- ‘숙성하는 의식’은 자체의 논리로 작동하지만, ‘사유하는 의식’의 토대로 기능한다.
- ‘사유하는 의식’도 그 자체의 논리로 기능하지만 동시에 ‘구별하는 의식’의 토대로 기능한다.

> 나와 별개인 대상. 주체와 대상이라는 이분법이 있으면 집착을 낳는다. 

2. 숙성하는 의식, 혹은 알라야식

◇ 숙성하는 의식은 알라야식()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것은 모든 과거 경험들의 종자들을 가지고 있다.
「유식30송()」2-후반부

◇ 알라야식은 자신 안에 미지의 대상과 장소들에 대한 의식 표상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항상 접촉(), 주의(), 인식(vid), 생각(), 의지()와 관련되어 있다.
「유식30송()」3

◇ 알라야식의 감수작용()은 무관심한 것이다. 이 의식은 순수하며 도덕적으로도 중립적이다. 이와 유사하게 접촉 등도 무관심하다. 알라야식은 급류의 흐름과 같다.
「유식30송()」4

◇ 알라야식은 아라한의 경지(arhattva)에 이르면 소멸된다.
「유식30송()」5-전반부

- ‘숙성하는 의식’이 바로 알라야식()이다.
- 바수반두에게서 중요한 것은 행위의 결과가 인간의 무의식적 층위에서 저장된다는 것이다.

- 알라야식은 아직 알려지지 않는 대상과 장소에 대한 의식 표상을 가지고 있으며, 나아가 일종의 감수작용도 수행한다.
- 바수반두는 ‘숙성하는 의식’ 즉 알라야식이 우리의 모든 정신적 행위와 감정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 바수반두는 알라야식 자체를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것이라고 보고 있다.

◇ 마나스(manas)라고 불리는 의식은
알라야식에 의지하고 알라야식을 대상으로 갖는다.
마나스는 본질적으로 사유 행위이다.
「유식30송()」5-후반부

◇ 마나스는, 그 자체로 순수하지 않지만 도덕적으로는 중립적인, 네 가지 오염물과 항상 관련되어 있다.
네 가지 오염물은 자아에 대한 믿음, 자아에 대한 무지,
자아에 대한 오만, 그리고 자아에 대한 사랑이다.
「유식30송()」6

◇ 마나스는 또한, 우리가 태어나서 살고 있는 세계와 동일한 본성을 갖고 있는, 접촉 등과 같은 다른 것들과 관련되어 있다.
마나스는 아라한의 경지에 이른 사람에게는 귀속되지 않는다.
그것은 고요한 의식 상태나 세속을 떠난 길에서 작동하지 않는다.
「유식30송()」7

◇ 이것이 의식의 두 번째 변형이다.「유식30송()」8-전반부


3. 사유하는 의식, 혹은 마나스

-마나스(manas)는 일종의 자기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마나스는 칸트(Immanuel Kant, 1724-1804)가 말한 통각(apperception)과 유사하다.
-칸트에게서 자기의식, 즉 통각은 인식기 성립하려면 갖추어야 할 필수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마나스란 알라야식에 근거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불변하는 자아라고 믿고 있는 의식이다.

-바수반두는 마나스가 “자아에 대한 믿음”, “자아에 대한 무지”, “자아에 대한 오만”, 그리고 “자아에 대한 사랑”과 관련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동아시아 불교 전통에서도 이 네 가지를 아치(我癡), 아견(我見), 아만(我慢), 아애(我愛)라고 부르면서 극히 경계하고 있다.

-알라야식이 행위 흔적이 무의식적으로 저장되어 작동하는 의식이라면, 그것을 불변하는 자아라고 믿는 것은 분명히 착각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4. 구별하는 의식, 혹은 나머지 여섯 가지 의식

◇ 세 번째 의식의 변형은 여섯 층위의 대상에 대한 지각과 동일한 것이다.
구별하는 의식은 성격상 선하거나 나쁘거나 아니면 중립적이다.
「유식30송()」8-후반부

◇ 가능한 조건들에 따라 다섯 가지 감각-의식은
함께이건 아니면 단독적으로건
근본적 의식[알라야식]에서 발생한다.
이것은 마치 파도들이 물에서 발생하는 것과 같다.
「유식30송()」15
- 알라야식과 마나스를 토대로 여섯 가지의 일상적 의식이 가능해진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눈의 의식[眼識, ]’, ‘귀의 의식[耳識, ]’, ‘코의 의식[鼻識, ]’, ‘혀의 의식[舌識, ]’, ‘촉감의 의식[身識, ]’, 그리고 ‘의식[意識, ]’이다.

- ‘눈의 의식’이 시각대상에 대한 것이라면, ‘귀의 의식’은 청각대상, ‘코의 의식’은 후각대상, ‘혀의 의식’은 미각 대상, 그리고 마지막으로 ‘의식’은 앞의 다섯 가지 대상을 대상으로 갖거나 개념을 대상으로 갖는 것이다.


5. 모든 것은 의식의 표상일 뿐이다.
◇ 세 층위로 이루어지는 의식의 변형은
단지 주체와 대상에 대한 분별일 뿐이다.
이렇게 분별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의식의 표상일 뿐이다.
「유식30송()」17

◇ 의식은 모든 종자들을 포함한다.
의식의 이러저런 변형들은 종자들의 상호 영향으로 진행되며,
그 때문에 이러저러한 분별들이 발생한다.
「유식30송()」18
- 바수반두에 따르면 우리의 마음 혹은 의식을 여덟 가지 층위로 구분되어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첫째; ‘눈의 의식’,
둘째; ‘귀의 의식’
셋째; ‘코의 의식’
넷째; ‘혀의 의식’
다섯째; ‘촉감의 의식’
여섯째; ‘의식’
일곱째; ‘마나스’,
여덟째; ‘알라야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