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강 마음으로 들어가는 두 가지 길 |
1. 마음, 의식 그리고 기억
- 베르그손, 창조적진화 2구절: 없음=있음+1, 순수한 없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없음은 머리 속에서만(기억이나 기대를 통해서만) 존재한다. -
베르그송(H. Bergson, 1859-1941)은 기억이나 기대가 없다면 ‘없음’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 베르그송은 기억이나 기대를 동일한 차원에서 열거하고 있지만, 사실 중요한 것은 기억이다. 3. 기대란 기억이 없다면 전혀 불가능하다. - 창조적 진화, 즉 미래로의 진화를 형이상학적으로 구성하려고 했던 베르그송으로서는 기대라는 미래적 의식을 강조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을 것이다. - 베르그송의 통찰은 우리의 내면이나 타자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이다. 4. 우리의 내면은 기억의 흔적들로 구성된다. |
- 강요된 기억 / 사적기억과 공적기억.
- 내가 기억을 달리하면 다른사람이다
- 기억의 재구성, 자기자신을 정당화 하지 못하는 이들을 정당화 시키기 위한. 미세한 역사의 따름. 기억.
제2강 트라우마를 다시 기억하기 혹은 정신분석학 | ||
1. 트라우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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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강 꿈이나 사소한 실수들의 심오한 의미 |
1. 정신을 분석하는 세 가지 방법 - 두 번째는 환자의 꿈을 해석하는 것이다. 이것은 꿈의 상태에서 자아의 저항은
약화된다는 측면에 주목한 것이다. - 세 번째는 환자들의 일상생활에서의 실수 행위에 주목하는 것이다. - 기억하기 싫은 이유 중 하나: 사회에서 억압하기 시작하면 기억하지 못함. 기억하기 싫어짐. - 그래서, 기억하기 싫은 것 대부분이 성적인 것과 연관되어 있다. - 꿈을 선택한 이유;모두가 꿈을 꾸기 때문에. 망상에 걸린이든, 그냥 사람이든..
(…) 이에 대해 가장 강경하게 반대하는 사람들은 어른의 꿈은 내용이 대개 해석하기 어렵고 소망의 실현과 상당히 다르다고 주장합니다. 이제 그 문제에 답하겠습니다. 그렇게 생각되는 이유는 꿈의 내용이 왜곡되기 때문입니다. 꿈을 꾼 사람에게 내재하는 심리 과정을 말로 표현하면 원래의 내용과는 상당히 달라지는 경우가 보통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아침에 깨어나서 어렴풋이 생각나는 꿈을 애써 말로 담아내는 꿈의 외현적인 표현과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잠재적인 꿈의 내용은 서로 크게 다릅니다. 이런 꿈의 왜곡은 앞서 히스테리 증상의 형성을 조사하면서 알게 되었던 것과 똑같은 과정입니다. 꿈의 경우에도 히스테리 증상과 마찬가지로 역시 정상적인 힘들이 꿈의 형성에 영향을 미칩니다. 따라서 꿈을 말로 표현하는 이야기는 무의식적 꿈의 내용을 왜곡하여 전달하게 되는데, 이 왜곡이 생기는 이유는 자아가 지닌 방어력, 즉 저항력 때문입니다.「정신분석학에 관한 다섯 차례 강의」 - 프로이트는 ‘잠재적인 꿈’(=‘잠재몽’=‘꿈-사고’)->억압된 용망/을 독해하려고 한다. - ex. 집 안에서 만찬 파티를 열고 싶었는데 음식이라곤 훈제 연어 밖에 없는 거에요. 밖에 나가서 뭐라도 좀 살까 했지만, 마침 일요일 오후여서 가게들이 모두 문을 닫았을 거라는 생각이 듦. 그래서 주문 요리집에 전화를 걸려 하니까 전화가 고장남. 그래서 할 수 없이 만찬 파티를 포기함. 해석: '어떤 욕망이 실현되었는가?' 그녀에게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녀의 남편은 그 친구에게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녀의 친구는 말랐는데 그녀의 남편은 통통한 여자를 좋아한다는 점이다. 결국 만찬은 그녀와 친구 사이의 관계를 암시하는 것이었고, 만찬의 좌절은 그녀의 친구가 통통해지지 않기를 바라는 그녀의 소망을 반영한 것이었던 셈. - 자기 욕망에 정직한 것.
◇ 외현적인 꿈의 내용에서는 꿈의 진정한 의미를 항상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즉 꿈은 전날의 경험에서 출발하며 충족되지 못한 소망의 실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잠에서 깨어났을 때 기억으로 알 수 있는 외현적인 꿈은 바로 억압된 소망의 위장된 실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것을 종합해보면 무의식적인 꿈의 내용이 어떻게 외현적인 꿈의 내용으로 왜곡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과정을 ‘꿈-작업’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우리의 가장 깊은 이론적 관심의 대상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꿈의 작업을 통해 우리는 무의식 속에서, 더 정확히 표현하면 의식과 무의식이라는 두 가지 독립된 심리적 체계 사이에서 예기치
않았던 심리적 과정이 생겨난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새롭게 발견된 심리적 과정에서 특히 눈여겨볼 것은 ‘응축’과 ‘전이’ 과정입니다.
「정신분석학에 관한 다섯 차례 강의」
- 프로이트는 잠재적 꿈이 외현적인 꿈으로 왜곡되는 과정, 즉 ‘꿈-작업’에 주목한다. 5. 일상생활에서의 실수 행위 |
제4강 섹슈얼러티에 대한 성찰 | ||||
1. 인간은 탄생에서부터 성적 욕망을 가지고 있다. 아기가 고집스럽게 뭔가를 입으로 빨려고 하는 버릇은 한편으로는 영양의 섭취에서 비롯되고 그것에 의해 자극되는 행동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섭취와 별도로 쾌락을 얻으려는 것이기도 하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성적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구순기에 이미 치아의 등장과 함께 가학적 충동이 분리되어 나타난다. 공격과 배설 기능에 충족을 찾으므로 우리가 가학적 항문기라 부르는 두 번째 시기에 이는 더 큰 범위에서 나타난다. 우리가 공격적 충동을 리비도에 포함시킬 수 있는 정당화의 근거는, 사디즘이 리비도적 충동과 파괴적 충동의 본능적 혼합물이며 이 혼합이 이때부터 지속된다는 견해에 있다. 세 번째 시기는 소위 남근기인데, 이 시기는 말하자면 성생활의 선구자로서 이미 성생활의 최종 형태와 유사하다. 여기서 양성의 성기가 아니라 남성의 성기만이 어떤 역할을 한다는 점이 주목할 만한 특징이다. (…) 남근기와 함께, 이 시기 동안 유아의 성욕은 그 절정에 달했다가 가라앉기 시작한다. 이제부터 소년과 소녀는 서로 다른 운명을 걸어간다. 이 둘은 그들의 지적 활동을 성 연구에 바치기 시작하고 남근이 모든 사람에게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이제 양성의 길은 갈라지게 된다. 소년은 오이디푸스 시기에 들어서게 된다. 소년은 남근을 자위하면서 동시에 어머니에 대한 남근의 그 어떤 성적 활동을 상상하기 시작한다. 이는 그가 거세 위협을 느끼는 것과 여성에는 남근이 없다는 것을 본 것이 결합되어 그의 생애에서 가장 큰 외상을 입게 되기까지 지속되고, 이 외상에 의해 그 모든 후속 결과를 갖는 잠재기가 시작된다. 소녀는 소년과 똑같이 하려는 시도가 수포로 돌아간 후 남근이 없다는 것 혹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음핵의 열등함을 인식하게 되고, 이는 성격 형성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런 경쟁에서의 최초의 실망의 결과 소녀는 종종 성생활 일반에서 멀어지게 된다.「정신분석학 개요」(1940) - 프로이트는 성적인 쾌감을 느끼는 신체 기관을 중심으로 유아의 성생활의 진행 과정을 설명한다. - 프로이트에 따르면 사내아이는 긍정적으로 남근에 의한 쾌감을 유지하나, 여자아이는 자신에게 남근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남근을 통해서 쾌감을 느낀 사내아이는 어머니에게 남근이 없다는 것, 그리고 어머니가 남근을 원한다고 상상한다. 이어서 사내아이는 자신의 남근이 어머니가 원하는 것이라고 상상한다. - 이로부터 사내아이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사내아이는 자신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아버지와의 경쟁 관계에 빠지고, 결국
거세의 위협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유아의 성생활은 표면에서 사라지고, 뒷날 사춘기의 성생활이 시작할 때까지 유아 속에 잠재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성적 본능은 유년기에는 존재하지 않고, 성숙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사춘기에 시작되고, 이성이 내보이는 매력에 불가항력적으로 이끌릴 때 나타난다는 것이다. 반면 그 목적은 성적 결합, 또는 성적 결합을 지향하면서 이루어지는 모든 행위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런 견해가 실제 상황의 진실된 모습이 아니라 그릇된 모습을 보여준다는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 (…) 이 대목과 관련해서 나는 두 가지 전문적인 용어를 소개하고자 한다. 하나는 ‘성적 대상(sexualobjekt)’으로서의 성적
매력으로 일으키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성적 목적(sexualziel)’으로서 성적 대상을 향한 본능적 행동을 일컫는 말이다.
과학적으로 면밀히 검토해보면 많은 일탈 행위가 성적 대상과 성적 목적이라는 양측면과 관련되어 발생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성적 이상」(1905) 왜냐하면 만지거나 보는 행위와 같은, 성적 대상에 대한 중간적인 관계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관계들은 성교에 이르는 도상에 놓여 있고, 예비적인 성적 목적으로 인식된다. 따라서 만지거나 보는 행위는 한편으로는 즐거움을 수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흥분을 고조시키는데, 그 흥분은 최종적인 성적 목적이 달성될 때까지 지속되어야 한다. (…) 성욕도착은 해부학적인 의미로 성적인 결합을 위해 마련된 신체 부분들의 범위를 넘는 확장된 성행위, 또는 정상적으로는 최종적인 성적 목적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신속히 지나가야 할 성적 대상에 대한 중간 단계에서 지체하는 성행위이다. (…) 성욕도착을 연구한 결과, 우리는 성본능이 저항력으로 작용하는 정신적인 힘들과 싸워야 하며, 그 힘들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수치심과 역겨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힘은 본능이 정상이라고 간주되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되는데, 만일
어느 개인의 성본능이 전성기에 이르기 전에 발달된다면, 성본능의 발달 과정을 결정하는 것은 의심할 바 없이 수치심이나 역겨움일 것이다.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성적 이상」(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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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강 마음의 위상학 2: 이드, 자아, 그리고 초자아 |
1. 자아에게는 대립될 수 있는 세 가지 자극 이 초자아가 자아와 구별되거나 자아에 대립하는 한에서, 그것은 자아가 고려할 수밖에 없는 제3의 힘이다. 자아의 행위는 그것이 자아, 초자아 및 실재의 요구를 동시에 충족시킬 때, 따라서 이들의 요구를 서로 조화시킬 수 있을 때 올바른 것이다. 자아와 초자아 사이 관계의 세부 사항은 보통 아이의 부모에 대한 관계로 거슬러 올라감으로써 이해될 수 있다. 부모의 영향으로 작용하는 것은 부모의 개인적 존재만이 아니다. 부모에 의해 이어지는 가족, 인종 및 민족 전통의 영향과 부모가 대변하는 각각의 사회적 환경의 요구도 작용한다. 마찬가지로 초자아는 개인 발달 과정에서 나중에 나타나는 전승자와 부모의 대체 인물 편에서 오는 기여도 받아들이는데, 그것은 교육자, 공공의 모범, 사회에서 숭배되는 이상과 같은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이드와 초자아가 근본적으로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일치점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과거의 영향들을 대변하는 바, 이드는 유전된 과거의 영향을, 초자아는 본질적으로 다른 이로부터 넘겨받은 과거의 영향을 대변한다. 반면 자아는 스스로 체험한 것, 따라서 우연적이고 현재적인 것에 의해 주로 규정된다.「정신분석학 개요」(1940) - 하나는 이드라는 장소에서 정신적으로 표현되는 내적인 욕망 2. 프로이트는 이드-자아-초자아로 구성된 마음의 위상학을 완성한다. - 자아와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살펴보면 이드와 초자아는 ‘과거’라는 시간성을 공유하고 있다. 이드가 유전된 과거의 영향을 나타낸다면,
초자아는 역사·문화적 과거의 영향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
제8강 쾌락원리를 넘어서[or 죽음의 본능]-정신분석학 강의4 |
1. 외상적 신경증과 아이들의 놀이 그러나 다른 한편 그들의 모든 놀이는 그들을 항상 지배하고 있는 욕망, 즉 어른이 되어서 어른들이 하는 것을 할 수 있게 되고자 하는 욕망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 것이 분명하다. 경험의 불쾌한 성격이 반드시 놀이에 부적합한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주목해야 한다. 만약 의사가 어린아이의 목을 검진하거나 아이에게 작은 수술이라도 하게 되면 이 무서운 경험이 그 아이의 다음 놀이 주제가 되리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과 관련하여 또 다른 출처에서 오는 쾌락의 산물이 있다는 사실을 간관해서는 안 된다. 어린아이가 경험의 수동성에서 놀이의
능동성의 상태로 변화해 감에 따라 그는 불유쾌한 경험을 그의 놀이 친구로 전이시킨다. 그리고 그는 이런 방식으로 대체된 인물에 복수하는
것이다.「쾌락원리를 넘어서」(1920) - 아이들은 자신들이 조우한 사건들, 그것이 유쾌한 것이든 불쾌한 것이든지 간에, 놀이를 통해서 반복하려고 한다. 프로이트는 불쾌한 인상도 피하지 않고 놀이로 반복하려는 아이들의 모습에 주목한다. ◇ 어떻게 해서 억압된 것의 위력의 표시인 반복 강박이 쾌락원리와 연결되어 있는가? 반복 강박을 통해서 다시 경험되는 것의 상당 부분은 자아에게 불쾌를 유발하는 것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경험은 억압된 본능 충동의 행위를 겉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이미 고려했던 종류의 불쾌이고 쾌락원리에 모순되지 않는다. 즉 한 조직에 대한 불쾌이면서 동시에 다른 조직에는 만족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새롭고 주목할 만한 사실에 다다르게 되는데, 그것은 반복 강박이 쾌락의 가능성을 전혀 포함하고 있지 않는 과거의 경험, 그리고 억압된 본능 충동에조차도 만족을 가져올 수 없었던 과거의 경험을 회상해낸다는 것이다. (…) 반복 강박-쾌락원리보다 더 원시적이고, 더 기초적이며 더 본능적인 것으로 보이는 그 무엇-의 가설을 정당화하기에는 아직도 많은 것들이 충분하게 설명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 반복 강박이 ‘과연’ 마음 속에 작동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 무엇인가를 알았으면 좋겠고, 그것이 어떤 기능을 갖는지, 어떤 상황에서 반복 강박이 나타나고 지금까지 정신 생활의 흥분 과정을 지배하는 모든 것의 근원이라고 여겼던 쾌락원리와는 어떤 관계를 갖는지 알았으면 좋겠다.「쾌락원리를 넘어서」(1920)2. 반복 강박으로부터 죽음 본능으로. - 프로이트는 과학자적인 태도를 보인다. 외상적 신경증 환자에게 드러나는 반복 강박에 대해 그는 철저하게 숙고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 반복적 놀이를 통한 끔찍한 사건을 통제 할 수 있다고 생각 함. 고통스러운 것을 반복 함으로써 불쾌한 느낌을 불쾌하지 않은 느낌으로 전환. 이것을 쾌락원리에 입각하여 풀어냄. - 쾌락원리: 인간은 불쾌->쾌감을 원한다. 외적 자극에 대한 (자아 입장에서의 무의식.이드.외부세계에서 오는 것) 근본 양 - 쾌락: 흥분의 감소 - 불쾌: 흥분의 증가 - 이것은 상대적인 것이다. 당시의 상황이 어떠한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꿈이란 프로이트에게는 억압된 욕망의 실현이었으나, 외상적 신경증은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그 꿈의 강도가 전혀 줄지 않았다. 그래서 외상적 신경증에서 프로이트는 죽음의 본능을 본다. 사건을 통해 자기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죽음을 쾌락의 원리로 봄. - 죽음을 본능으로 본다는 관점이 신선하다. 이 삶에 죽음이 있기에, 이별, 끝이 있기에 우리는 더욱 의미부여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우리는 저 밑바닥으로부터 죽음의 본능을 가지고 있을 수도 모르겠다. 자기 자신을 파괴하려는 본능, 욕구에 대한 그들의 배경이 너무나 슬프지만, 인간의 파괴 본능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 흥미로운 지점이다. 모든 것은 해체를 향하고, 우리의 육체 또한 그렇다면 이 본능은 굉장히 설득력이 있지 않나? 우리 안에는 파괴와 창조가 함께 있는 것인가.. 3. 본능의 두 가지 경향, 삶 본능과 죽음 본능. 생명 과정에 의해서 취해진 이런 두 가지 방향 속에서 우리는 생명 본능과 죽음 본능이라는 두 개의 본능 충동의 행위를 읽어낼 수 있을까? 어찌되었든 우리가 눈감고 있을 수 없는 다른 것들이 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쇼펜하우어 철학의 항구 속으로 배를 몰아 온 것이다. 그에게 있어 죽음이란 ‘진정한 결과이자 연장된 삶의 목표’인 반면, 성적 본능은 삶에 대한 의지의 구체적 표현이다. (…) 개체의 생명 과정은 내적인 이유로 해서 화학적 긴장의 소멸, 다시 말해서 죽음으로 향하고, 반면에 다른 개체의 살아 있는 물질과의 결합은 그러한 긴장을 고조시켜 이른바 신성한 ‘생명 고취적 차이’를 도출해낸다는 것이다. 이런 차이와 관련하여 하나 혹은 그 이상의 최적 조건이 존재할 것임에 틀림없다. 정신 생활 및 신경 생활 전반의 지배적인 경향은 자극 때문에 생긴 내적 긴장을 줄이거나 일정한 상태로 유지하는 것, 혹은 그것을 제거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바라 로우Barbara Low의 용어를 빌리자면 ‘열반원리Nirvana-Principle’이다.) 이런 경향은 쾌락원리 속에서 발견된다. 우리가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죽음 본능의 존재를 믿는 가장 강력한 이유 중의 하나이다. 「쾌락원리를 넘어서」(1920) - 프로이트는 본능에는 상이하며, 심지어는 대립적이기까지 한 두가지 종류의 것이 있다는 다소 충격적인 가설을 제안하게 된다. - 죽음 본능이란 가설을 제안하면서 프로이트는 이 본능이 쾌락원리와 부합한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 쾌락원리에 따르면 쾌락이 기본적으로 자극에 대한 흥분의 양이 감소할 때 가능한 것이라면, 불쾌는 자극에 대한 흥분의 양이 증가할 때 발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의 생명체가 죽는다는 것은 최고의 쾌락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자극에 대해 전혀 흥분하지 않는 상태가 바로 죽음이라면, 죽음이란 역설적으로 흥분의 양 자체가 제로가 되어버리는 쾌락의 지점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열반’을 뜻하는 글자 ‘Nirvana’는 불(vana)이 꺼진(nir)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생명이 완전히 소멸하면 우리는 일체의 불쾌가 무의미해지는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 쾌락원리: 불쾌를 없애려는 것-> 본능1의 원리 - 현실원리: 불쾌와 타협해주는 것. 나중에 쾌락을 실현해야지 -> 자아의 원리 - 니르바나, 열반원리: 내적긴장의 와해, 소멸-> 본능 2의 원리
그것은 또한 내가 ‘전성기기의 조직’이라고 이름 붙인 것 속에서도 지배적인 구성 본능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대상을 해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사디즘적 본능이 어떻게 생명의 보존자, 에로스로부터 나올 수 있다는 말인가? 사디즘은, 사실상 자기애적 리비도의 영향에 의해 자아에서 강제로 분리되어 결국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죽음 본능이라고 생각해도 그럴듯하지 않을까? 그것은 이제 성적 기능의 봉사를 시작한다. 리비도 조직의 구순기 동안 대상에 대해 성적 지배를 달성하는 행위는 대상의 파괴 행위와 일치한다. 그러다가 드디어 성기기가 우위를 차지하는 단계에 이르면 사디즘적 본능은 재생을 목적으로 성행위를 수행하기에 필요한 정도로 성적 대상을 압도하는 기능을 부여받는다. 자아에서 강압적으로 떨어져 나온 사디즘은 성적 본능의 리비도적 성분을 지향하며, 이 성분은 대상을 향해 그 뒤를 따른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원래의 사디즘이 조금도 완화되지 않거나 혼합되지 않는 곳에서는 언제나 성적인 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랑과 증오의 양가 감정을 발견하게 된다. 「쾌락원리를 넘어서」(1920) - 프로이트는 죽음 본능, 즉 파괴하고 이완시키는 죽음 본능의 사례로 사디즘(Sadism)을 이야기한다. - 사디즘에 사로잡힌 사람은 관계나 심지어 대상을 파괴하는 데서 쾌감을 느낀다. - 죽음 본능이 성적인 대상이 아니라 자아에게로 향할 때 그것은 마조히즘(Masochism)이라는 도착적 형태로 드러난다. 그것은 누군가가 자신을 파괴하려고 할 때 성적인 쾌감을 느끼는 도착된 성행위를 지칭하는 것이다.
그것은 외부세계를 고려하여 가장 유리하고 가장 위험이 없는 종류의 충족을 찾아내야 하는 자아의 과제이다. 초자아가 새로운 욕구를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초자아의 주된 업무는 충족을 제한하는 것이다. 이드의 욕구 긴장의 배후에 있다고 가정되는 힘을 본능Trieb이라 부른다. 이 힘은 정신생활에 대한 신체적 요구를 대변한다. 그것은 모든 활동의 최종 원인임에도 불구하고 보수적인 성격을 갖는다. 어떤 존재가 도달한 모든 상태로부터 이 상태를 떠나자마자 그것을 복구하려는 노력이 일어난다. 따라서 무수한 수의 본능을 구별할 수 있는데, 우리는 일상적인 실천에서 실제로 그렇게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 모든 다양한 본능들은 몇몇 소수의 기본 본능들로 환원하는 것이 가능하냐는 것이다. 우리의 경험에 따르면, 본능은 그 목적을 (전위에 의해) 변화시킬 수 있으며, 어떤 한 본능의 에너지가 다른 본능의 에너지로 이전됨으로써 본능들은 서로 대체될 수 있다. 이 후자의 과정에 대해서는 아직 잘 이해되고 있지 못하다. 우리는 한참 동안 주저하고 망설이다가 두 가지 기본 본능, 즉 에로스와 파괴본능을 가정하기로 결정했다. 「정신분석학 개요」(1940) - 육체로부터 기원하는 우리의 욕망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한다. - 엔트로피를 한 개체의 욕망이라고 보아야 할 것인가? 생명이 나아가는 방향의 한계로 보아야 하는 것일까? |
- 사회(공동체)가 개체에게 금지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 중 하나가 분명히 죽음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 자살의 목적은 행복하기 위해. 그러나 사회는 죽음을 개체가 결정하지 못하게 함. 그러나 프로이트는 자살을 본능으로 이야기 함. 목적론(결과를 원인속에 집어넣기)적으로의 접근일 수 있기에 위험할 수도 있음. 어짜피 죽는 것이기 떄문에 우리의 목적이 죽음이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가? 자살하려는 이가 자살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는가, 행복이 목적이었는가? 순수히 죽음만이 목적인 삶이 가능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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