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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y 두치고 2010. 8. 20.

삶은 논증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하나의 세계를 배치해 왔다. ㅡ물체, 선, 면, 원인과 결과, 운동과 정지, 형식과 내용이라는 공준들로써 말이다. 이런 믿음의 조항들이 없다면 이제 누구도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것들이 입증되고 증명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삶은 논증이 아니다. 삶의 조건들 가운데에는 오류가 있을 수 있다.
 
궁극적 회의주의. 그렇다면 결국 인간의 진리는 무엇인가?ㅡ그것은 인간의 반박할 수 없는 오류들이다.
 
"신이 어디로 갔느냐고? 너희들에게 말하겠노라! 우리가 신을 죽였다. ㅡ너희들과 내가! 우리 모두 신의 살해자다!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이 일을 저질렀을까? 우리가 어떻게 바닷물을 다 마셔버릴 수 있단 말인가? 누가 우리에게 지평선 전체를 지워버릴 수 있는 스펀지를 주었을까? 태양에 묶인 지구의 사슬을 풀어버렸을 때 우리는 무슨 짓을 한 것일까? 이제 지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지금 우리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모든 태양들로부터 멀어지는가? 우리는 영원히 추락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위로, 옆으로, 앞으로, 모든 방향으로? 위든 아래든 남아 있기나 한가? 무한한 허무를 통과하듯 헤매고 있는것은 아닐까? 우리는 허공의 입김을 느끼고 있는 건 아닐까? 더 추워지고 있는 건 아닐까? 밤이 점점 더 모든 시간을 덮쳐 오는 건 아닐까? 아침에도 등불을 밝혀야 하는 건 아닐까? 우리는 신을 파묻고 있는 인부들의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하고 있는 건가? 신의 시체가 부패하는 냄새가 나지 않는가?ㅡ신들도 부패한다! 신은 죽었다! 신은 죽은 채로 있다. 그리고 우리가 신을 죽였다! 살해자 중의 살해자인 우리는 어떻게 우리 자신을 위로할 것인가? 지금까지 세상에 존재했던 그 무엇보다도 신성하고 강한 것이 우리의 칼 아래 피를 흘리며 죽었다.
 
"관념들이 내 지평선 이로 떠올랐다네. 나는 이전에는 그와 유사한 것들을 결코 보지 못했지.... 난 반드시 몇 년 더 살아야 할 것 같다네! ...나의 이 강렬한 느낌들은 나를 소름끼치게 만들고 또 웃게 만들지.ㅡ나는 두어 번 눈이 충혈되었다는 바보 같은 이유 때문에 방을 나갈 수 없었어. ... 매번 그 전날 산책하면서 너무 울었기 때문이지. 감상적인 눈물이 아니라 기쁨의 눈물이었다네. 나는 울면서 노래했고 무의미한 말을 중얼거렸지. 새로운 비전으로 가득 차서..."
 
새해에 대해. 나는 아직 살아 있고, 나는 아직 생각한다. 나는 계속 살아야만 한다. 계속 생각해야 하므로. 나는 존재한다, 고로 나는 생각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새해 첫날인 오늘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의 소망과 자신의 가장 소중한 생각을 표현할 기회가 주어진다. 그래서 나 역시도 오늘 내가 나 스스로에게 바라는 바를, 그리고 올해 처음으로 맹세한 것이 어떤 생각이었는지를 말하고 싶다. ㅡ 어떤 생각이 앞으로의 내 삶의 토대이자 보증인이자 감미로움이 될 것인지를! 나는 사물들에 있어서 필연적인 것을 그것들의 아름다움으로 보는 법을 더욱더 터득하고 싶다. ㅡ 그리하여 나는 사물들을 아름다게 만드는 사람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네 운명을 사랑하라. ㅡ 지금부터는 이것이 나의 사랑이 될 것이다! 나는 추한 것과 전쟁을 벌이고 싶지 않다. 나는 비난하고 싶지도 않다. 심지어 나를 비난하는 자들까지도. 눈길을 돌리는 것이 나의 유일한 부정의 형식이 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 ㅡ 앞으로 나는 언제나 긍정하는 자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무거운 짐. 어느 날 낮, 또는 어느 날 밤 그대가 가장 쓸쓸한 고독 속에 잠겨 있을 때 한 악마가 그대 뒤로 슬며시 다가와 그대에게 이렇게 말한다면 어떨까. '네가 지금 살고 있고, 또 살아왔던 이 삶을 너는 다시 그리고 또 다시 살아야 할 것이다. 무수히 반복해서. 거기에 새로운 것은 전혀 없으며, 모든 고통, 모든 기쁨, 모든 생각과 탄식, 그리고 네 삶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이 크고 작은 모든 것들이 틀림없이 네게로 찾아올 것이다. 모든 것이 똑같은 차례와 순서로. ㅡ 나무들 사이의 이 거미와 이 달빛이 똑같은 방식으로, 그리고 이 순간과 나 자신도 똑같은 방식으로. 실존의 영원한 모래시계가 다시 그리고 또다시 뒤집혀질 것이다.
무엇보다도 '너는 다시 그리고 또다시, 무수히 반복해서 이것을 원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그대의 모든 행위에 가장 무거운 짐이 될 것이다! 이 궁극적이고 영원한 인가와 인증을 받는 것이 그대의 가장 큰 욕구가 되기 위해서 그대는 그대 자신과 그대의 삶에 대해서 얼마나 큰 호의를 가져야 할까?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어떤 것이다'
'많은 것들이 기괴하다. 그러나 인간보다도 더 기괴한 것은 없다'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




 
그대는 자신을 자유롭다고 말하는가? 내가 듣고 싶은 것은 그대를 지배하는 사상이지, 그대가 멍에로부터 벗어났다는 사실이 아니다. 그대는 멍에로부터 벗어나도 되는 그런 자인가?
 
 
 
그대들에게 적이 있다면 악을 선으로 갚지 않도록 하라. 그것을 적을 부끄럽게 할 뿐이다. 차라리 적이 그대들에게 선한 일을 했음을 증명하라. 저주의 말을 들었을 때에는 축복하지 마라. 나는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차라리 같이 저주하라!
자신이 옳다고 고집하는 것보다 자신의 그릇됨을 인정하는 것이 더 고상하다.
 
 
 
젊은 그대는 아이를 원하고, 혼인을 원한다. 하지만 나는 그대에게 묻는다. 그대는 아이를 원해도 되는 인간인가?
그대는 승리를 거둔 자인가? 자신을 극복한 자인가? 관능의 지배자인가? 그대는 덕의 주인인가? 나는 그대에게 묻는다.
아니면 그대의 소망에는 짐승과 절실한 욕구가 들어 있는가? 아니면 고독해서인가? 아니면 자신이 불만스러워서 인가?
그대는 창조하는 자를 창조해야 한다. 창조한 자들 보다 더 나은 한 사람을 창조하려는 두 사람의 의지, 이것을 나는 혼인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그대가 말하는 혼인의 의미이자 진리가 되도록 하라. 하지만 많고 많고 많은 사람들, 쓸데없는 어중이떠중이들이 혼인이라고 부르는 것, 나는 이것을 뭐라고 불러야 한단 말인가?
아, 두 영혼의 이 빈곤함이여! 아, 두 영혼의 이 더러움이여! 아, 두 영혼의 이 가련한 안락함이여!
사랑이란 그대의 보다 고귀한 길을 비춰줘야 하는 횃불이다. 그대들은 언젠가 그대들을 넘어 사랑해야 한다! 그러니 먼저 사랑하는 법을 배우도록 하라! 그리고 그 때문에 그대들은 사랑의 쓴잔을 마셔야 한다.
 
 
 
사람에 따라 마음이 먼저 늙는 자와 정신이 먼저 늙는 자가 있다. 그리고 젊은 나이에 백발이 되는 자도 있다. 그러나 늦어서 청년이 되는 자는 오랫동안 젊음을 유지한다.
죽음에 직면해서도 그대들의 정신과 덕은 저녁놀처럼 이글이글 타올라야 한다.
 
 
말하라, 나의 형제들이여. 우리는 무엇을 나쁜 것, 가장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퇴화가 아닌가?
하지만 퇴화의 마음은 " 모든 것은 나를 위해 존재한다"라고 말하면서 우리에게 전율을 안겨준다.
 
나의 형제들이여, 그대의 정신과 덕은 대지의 의미에 충실하도록 하라. 모든 사물의 가치를 그대들이 새로이 정립하도록 하라! 그 때문에 그대들은 투쟁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 때문에 그대들은 창조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대들이 나를 만났을 때 그대들은 아직 그대들 자신을 찾지 못했었다. 신도들이란 모두 이렇기 때문에 신앙이란 이 처럼 죄다 보잘 것 없는 것이다. 이제 나를 버리고 그대들을 찾도록 하라. 그리고 그대들 모두가 나를 부정하게 될 때 비로소 나는 그대들 곁으로 되돌아 올 것이다.
 
 
그대들은 신을 사유할 수 있는가? 그런데 진리에의 의지란 모든 사물을 인간이 생각할 수 있고, 볼 수 있으며, 느낄 수 있는 것으로 바꾸는 일이다! 그대들은 자신의 감각을 끝까지 사유해야 한다.
그대들의 이성, 그대들의 심상, 그대들의 의지, 그대들의 사랑이 세계 자체가 되어야 한다!
 
 
자기 자신에게 명령을 내릴 때라도 그것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는 자기 자신의 율법에 대한 재판관이자 집행관이며 희생물이 되어야 한다.
내가 삶 그 자체의 마음속으로, 그 마음의 밑바닥까지 기어들어 갔는지 확인해보라!
삶이 있는 곳에만 의지도 있다.
 

인간이란 결국 자기 자신만을 체험할 뿐이다.
많은 것을 보려면 자기 자신을 단념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인간에게 대지와 삶은 무겁다. 따라서 가벼워져서 새가 되기를 바라는 자는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인간은 온전하고 건강한 자로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나는 가르친다.
 
 
"빼앗아서는 안 된다! 남을 죽여서는 안 된다!" 일찍이 이런 말은 신성하다고 불렸다. 이런 말 앞에 사람들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며 신발을 벗었다. 하지만 그대들에게 묻는다. 그러한 신성한 말 보다 더 고약한 강도나 살인자가 세상에 존재한 적이 있었던가? 모든 삶 자체에 강탈과 살인이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런 말이 신성하다고 불림으로써 진리 자체가 살해되지 않았던가? 또는 모든 삶에 모순되고, 그 삶을 거역하는 것을 신성하다고 부른 것이 죽음의 설교였던가?
 
 
바람처럼 행동하라. 산속의 동굴에서 불어닥치는 바람처럼! 바람은 자신의 피리 소리에 맞추어 춤추려 하고, 이 바람의 발자취 아래에서 바다는 떨며 깡충깡충 뛰논다.
아직 얼마나 많은 일이 가능한가! 그러므로 부디 그대들 자신을 넘어 웃는 법을 배워라. 그대들 마음을 드높여라. 그대들 멋지게 춤추는 자들이여, 높게! 더 높게! 그리고 멋지게 웃는 것도 잊지 마라!
 
레지널드 홀링데일
 
니힐리즘의 미로를 벗어날 길
'위버멘쉬', 즉 자기 자신의 주인인 인간.
그러나
스스로를 지배한다는 것
은 모든 과제들 중 가장 어려운 과제다. 그 과제는 가장 큰 힘을 요구한다. 그것을 할 수 있는 자는 힘의 가장 큰 증대를 경험한다. 그리고 만일 행복이 힘이 증대하는 느낌, 즉 저항이 극복된 느낌이라면, 위버멘쉬는 가장 행복한 인간이며 그 자체로서 실존의 의미이자 정당화가 될 것이다. 삶의 혼돈을 삶의 지속적인 자기 극복으로 변화시키고, 따라서 이런 자기 극복과 동의어인 기쁨을 훨씬 더 크게 경험하도록 하는 힘의 지속적 증대를 통해서 말이다. 그것은 이제 삶의 의미가 될 것이다.
기쁨에 이른 사람은 삶이 아무리 많은 고통을 포함하고 있을지라도 삶을 긍정하고 사랑한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모든 것들은 연결되어 있고 함께 얽혀 있으며", 따라서 모든 것은 총체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전체의 일부분임을 깨닫기 때문이다.
위버멘쉬가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서 느끼는 기쁨은 힘에의 의지의 궁극적인 승화이자 니힐리즘의 최종적 극복이며, 영원히 그럴 것이다. 그런 승화가 없다면 니힐리즘은 냉혹하고 피할길 없다.
 
 
진리는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어떤 것, 우리가 복종하거나 그 앞에 멈춰 서야 할 어떤 것도 아니다. 진리는 우리가 창조하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우리 안에서 자신을 과감히 주장해 온 특수한 종류의 존재와 생명의 표현이다.
 
니체의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작품으로서 지체를 현대 철학의 선구자로 인정하게 한 이 작품은 존재의 의미가 종교적 신앙이나 진리에 대한 유약한 복종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매우 강력한 삶의 힘, 열정적이고 혼돈스럽고, 자유로운 힘에 있음을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