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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렁 이 의 길/인 권 활 동 기 록 - 1 2 ~ 2 3 년

상담일기

by 두치고 2015. 2. 7.



그런 잔인한 생각들이 내 삶에 들어오는 상황이 그냥 싫었던 것 같다. 내가 그런 잔인한 상황앞에 서 있는 상상이 뭔가 나를 갉아 먹는 것 같고, 그랬다. 그런데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니.. 그러면 내가 이 일을 계속 한다면 계속 짊어지고 갈 부분일 것이다.

내 삶에서 그러한 삶들을 계속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냥 보지 않고, 계속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보고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보지 않고 살아간다면, 내가 행복할까?
본다면?

행복이 모든 것의 척도인가?
내 삶의 최우선의 목표가 언제부터 행복이었나?
행복이 여러가지의 감정 중 하나 인 것이라면,
예를들어 만족과 기쁨 즐거움 따위의 감정을 =행복이라고 정의내리는 것이라면
언제나 그 감정을 붙들고 있으려는 것 자체가 허상일 뿐. 인간은 그럴 수 없는 존재이지 않을까?
영원히 기쁘고 만족을 구할 수 있는 상태라는 것이 있을 수 있을까?

어떤 상황에서도 내가 어떻게 의미부여하느냐에따라서 가능할 수도 있겠지.
그럼 즉 기쁘거나 즐거움 만족 따위의 감정, 생각, 욕구 들로 내 삶을 채우고 그것이 아닌 다른 감정들을 나는 지향하지 않나?
하지만 사실 결핍과 분노, 슬픔 으로부터 삶의 큰 영감을 얻고 더 깊이 삶을 느끼기도 한다.
나 자신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주요한 원천이 되기도 하고 그러한 것들이 더욱 나 자신과 삶을 발전시키고자 하는 욕구에 반영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질문에서 행복을 이야기할 수 없다.

무엇을 지향할 것인가?
나는 삶을 그대로 느끼고 싶은 것 같다.
되도록 그 민낯을 느끼고 싶다.
삶이란 그 속에 등장하는 존재와 시공간 그리고 나로 구성될 것이다.


그것들을 이해하고 느끼고 싶다.
더 넓고 깊고 또는 그 차원에서 느낄 수 없는 특별한 것들을 느끼고 싶다.

그렇다면 이러한 경험과 탐험의 욕구로부터
마지막 질문(볼것인가 말것인가)에 대한 대답은 전자일수도 후자일 수도 있다.
사실 그게 본질이 아닐 수도 있다. 내가 무엇을 볼것이냐보다 어떻게 볼 것이냐에 딸린 것일 수 있따.
하지만 무엇을 볼 것이냐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무엇을 볼 수 있는 환경에 날 두느냐에 따라서 내가 보는 세상의 영역은 많이 아주 많이 달라질 것이다.



나는 어쩌면 내가 속한 사회에서는 가장 먼 곳. -물리적으로든 또는 그렇지 않든-의 이야기들에 닿아 있다.
또 가장 가깝지만 가장 그 깊고 깊은 세상의 구석의 이야기 - 그 구석이라고 함은 많은 인간들이 만든 중심으로 부터 벗어난- 이기도 하다. 중심의 이야기에는 잘 닿을 수 있다. 권력이있는 자라면.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 그리고 삶의 경험들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나는 내 분노를 해결하기 위해 이곳으로 뛰쳐 들어왔다.
그렇게 의미부여 했다.

그럼 1. 나는 내 분노를 해결했나?
2. 이 활동이 내 분노를 해결하는데 정말 도움이 되나?
3. 지금 현재도 이 활동이 분노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난민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내 삶에서 단 한번도 그런 상황이 없었기 때문에 공감하기 힘든 때가 있다.
그래서 공감하고 이해하기 위해 그러한 상황들을 거듭 구체적으로 상상해보고, 내가 그 사람이라면.. 이라고 생각해 버릇 했다.
그리고 그 상황에 있었던 사람을 진정 감정적으로든 이해하고 싶었고
내가 그냥 헛소리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 상황에 대해서 같이 이야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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