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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수 염 고 래/공 부

실천적 불교사상_불교란 무엇인가?_안다는 것은 무엇이며, 나의 두려움은 어디서부터 오는가?

by 두치고 2013. 7. 16.





1. 불교란 무엇인가?

(1) 종교의 형태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다. 이 종교는 크게 '믿음의 종교'와 '지혜의 종교'로 나눌 수 있다. 인간이 갖는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안으로 '믿음의 종교'는 나 밖에 있는, 외부에 있는 어떤 힘 있는 큰 존재의 도움으로 이 두려움을 극복하고자 하는 데서 출발하며, '지혜의 종교'는 인간이 갖는 두려움과 고통이 무지로부터 생겨난다고 보기 때문에 자기 내면의 힘으로 그 무지를 그복함으로 해서 두려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데 있다. 


-> 나는 믿음으로써의 종교가 필요한가? 또는 지혜로써의 종교가 필요한가? 본 강의에서 정의하는 종교의 형태는 편협하다. 마치 지혜로써의 종교를 설득하고자 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1) 믿음의 종교

 ㄱ. 원시종교(민속신앙)

  자연은 인간의 삶을 보살피는 토대가 되기도 했지만,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존재이기도 하였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인간은 자연에 신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를 원시종교, 민속신앙이라고 지칭한다. 인간은 살고자 하기 때문에 삶이 위협받는 상황에 대한 공포, 두려움을 가지고 있으며 두려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데서 종교가 발생하였다. 여기에는 '믿음'이 기초가 되었다. 신이 있다는 믿음, 신적 존재의 노여움을 달랠 수 있다는 믿음. 이러한 믿음에 모순이 있다는 것을 의심하게 된다.


ㄴ. 고등종교

 믿음을 기초로 하면서도 그 안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좀 더 발달된 종교를 고등종교라고 할 수 있다. 자연신에서 인격신으로 섬기게 된다. 곳곳에 다 신이 내재해 있다는 데서 어떤 하나의 신에 의해서 이 모든 것이 움직인다는 창조신이 나왔다. 이 창조신의 형태는 유일신, 또는 다양한 신을 함께 인정하기도 또는 아직도 자연신을 그대로 숭배하는 현상도 있다. 이것이 어떤 근거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며, 믿음을 기초로 하기 때문에 진위를 가리기 어려웠으며, 또 진위를 가리지 않았다. 각자 그 믿음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은 나와 달리 믿는다는 것만 인정하면 공존이 되는데, 이것이 나의 믿음이 아니라 객관적 진실이라고 착각을 하게 됨으로 다른 사람의 믿음을 부정하게 되면서 심각한 갈등, 분쟁이 발생하게 되었다.


-> 원시종교와 고등종교의 차이는 무엇인가? 원시종교는 두려움과 그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함이 큰 전제가 되고 있다면, 고등종교와 같은 경우 상대적으로 그 전제가 약하다고 볼 수 있을까? 하지만 그 종교가 파생된 인간의 근원은 결국 같다는 생각이 든다. 좀 더 행복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원시종교에 대한 모순을 느꼈다는 것에 있어서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원시종교든, 고등종교든 믿음의 형태가 다른 것이고 그것은 믿는 이에 따라 모순을 느끼지 않을수도 느낄 수도 있는 것이다. 



2) 지혜의 종교

믿음의 종교와는 전혀 다른 측면으로 종교가 '지혜의 종교'이다. 자연 현상에는 어떤 원리가 있다는 것, 그 원리를 우리가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그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근본적인 관찰)

두려움은 마음에서 생기는 것인데, 어떤 현상에 대해서 그 원리를 알지 못한다면 마음이 두려워진다는 것, 즉 두려움은 무지로부터 일어나며, 이 무지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두려움은 사라지게 된다.

여기서는 지혜를 중요시한다. 사물의 이치를, 존재의 이치를, 법의 이치를 확실히 깨닫게 되면,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무지, 그렇다면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내가 두려움을 느끼는 것, 느끼는 때는 무엇이고 언제이며 왜인가?




 


ㄱ. 유교

'네가 그렇게 행동하면, 타인에게 해를 주게 되고, 화를 자초한다. 그러니 타인에게 해가 되는 행동은 하지 마라. 타인에게 손해가 되는 행동을 하지 마라. 그럴 때 오히려 복이 돌아온다' 이런 윤리적인 것을 기초로 하면서 좀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간 것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 유교이다. 여기는 어떤 신을 섬긴다든지 하는 개념이 없다. 조상을 섬기는 개념 정도는있지만 다른 인격신이나 자연신을 섬기는 현상은 없다. 여기에서는 자기의 몸과 마음을 잘 조율하는 수양을 매우 중요시 한다. 


ㄴ. 도교

자연적인 요소, 자연신적인 요소와 결합된 것이 도교이다. 윤리, 도덕이 지나치게 강조되면서 그것이 도리어 인간을 억압하고 고통을 주기 때문에, 인위적인 것을 좀 버리는, 그래서 좀 더 인간의 자연스러움을 토대로 하는 도교가 나오게 되었다.


ㄷ. 불교

불교는 유교, 도교와는 다르다. 불교는 좀 더 과학적이다. 윤리적인 요소가 있지만 이보다는 더 근원적인, 세상을 더 근본적으로 관찰하는 요소가 있다. 우리의 고통, 두려움, 괴로움은 밖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고 무지로 부터 발생한다. 알지 못할 때 두려움이 생기는 것이다.

어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하는, 그 무지를, 어리석음을 없애고 진실을 발견하려고 하는 관점을 갖고 있다. 

불교는 과학과 비슷한 측면을 갖고 있다. 과학이 주로 자연현상, 물질세계에 대한 연구하면, 불교는 인간의 정신현상, 마음작용이 연구의 대상이 된다. 과학자가 사물의 법칙을 이해하려고 연구하듯, 불교는 마음의 작용을 알려고 연구한다. 불교에서는 '연구'라는 용어 대신, 참구라는 용어극 쓴다. 그래서 우리가 '화두를 참구한다'는 말을 쓴다.

-> 마.음.짝.연.구. 그것이 불교이다.



2. 불교란 무엇인가?

(1) 깨달은 이의 가르침, 불교

ㄱ. 깨달은 이, 붓다

 불교는 '깨달은 이의 가르침'이라는 한자. '깨달은 이'란 무지를 깨친 자, 눈을 뜬 자, 그래서 사물의 실상, 법의 실상을 본 자이다. 법의 실상을 보면 두려움이 사라진다. '두려움이 없는 자, 괴로움이 없는 자'이렇게도 표현이 된다.

붓다=모든 두려움에서 벗어난자,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난 자, 모든 속박에서 벗어난 자


ㄴ. 깨달은 이의 가르침, 불교

깨달은 이의 가르침이란 깨닫지 못한 이를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가르침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에는 반드시 붓다가 있어야 하고, 두번째는 붓다의 가르침이 있어야 한다.


ㄷ. 가르침의 대상인 꺠닫지 못한 자, 중생

깨닫지 못한이를 중생이라고 한다. 중생이 깨달으면 붓다가 된다. 누구나 붓다가 될 수 있다. 

붓다가 중심이 아니라 깨닫지 못한 중생이 가르침의 중심이다. 깨닫지 못한이의 상황과 처지가 다르기 때문에 가르침이 딱 하나만 있는게 아니라 그 가르침이 많은 것이다. 가르침이 많아 불교가 복잡하다고 하기도 하는데, 불교의 가르침은 굉장히 단순하고 간단하다. 많은 가르침이 깨닫게 해준다는 아주 간단한 하나로 귀결이 되기 때문이다. 


ㄹ. 가르침을 받아,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는 사람, 보디사트마

깨닫지 못한이가 꺠달음의 가르침에 의지해서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과정에 있는 자를 보디사트바, 보살 이라고 부른다.




(2)깨달음, 존재의 참모습을 알아차린다.


ㄱ. 있는 그대로의 모습, 실상

그렇다면 무엇을 깨닫는가? 법의 실상을 깨닫는다. 여기서 '법'이란 존재, 이 세상에 내재해 있는 모든 존재들을 말한다. 존재의 실상을 깨닫는 것, 여기서 '실상'이란 참모습이다. 즉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알아차린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을 모르는 것을 무지라 하고, 사실을 사실대로 아는 것을 지혜라 한다. 깨닫는 것사실을 사실대로 아는 것을 말한다. 

존재의 참모습, 있는 그대로 사실을 알아차리면 두려움, 괴로움은 사라져버린다. 이 '실상'은 자연현상, 물질현상뿐만 아니라 생명현상, 정신현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 사실은 어떠한 경지에까지 도달한 지점인가? 내가 사실이라고 믿는 그 순간, 사실이 왜곡되어 버릴 수도 있는 것이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쉽지 않은 것인가? 있는 그대로 사물을 보는 것이 어찌하여 두려움을 없애는 길인 것인가?


ㄴ. 실상을 아는 것, 깨달음

'있는 그대로 본다, 깨닫는다'의 대상은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모든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 실상을 깨닫는 것이다. 실제 내가 그것의 진실을 알든 모르든 실상(진실)은 있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안다, 내가 모든다의  차이 밖에 없다.

깨달음이란 내가 그 실상을 모르다가, 그 실상을 아는 것이다. 이것은 가려진 것을 벗겨내서 보는 것과 같다.

'정견','조견(불을 비추어보다)','관(있는 그대로 보는 것)'

관자재보살이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데 자유자재한 자, 사물을 있는 그대로 다 볼수 있는 즉 깨달은 자이다. '타인의 마음을 그대로 아는 자, 고통을 고통으로 그대로 아는 자'라는 말이다.

-> 타인의 마음을 그대로 아는자, 고통을 고통으로 그대로 아는자. 하... 정말 어렵다. 깨달음에 도달하면 타인의 마음 또한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것이구나. 그것은 내 안에 매몰되어 있는 상태도 아닐 것이고, 그렇다고 나를 온연히 떠난 것도 아닐 것이다. 


ㄷ. 깨달음에 이른 상태, 열반과 해탈

'괴로움이 소멸된다, 두려움이 사라져버린다'는 것을 인도말로 '니르바나', '니르바나에 이른다'라고 한다. 니르바나=열반=멸(괴로움의 멸한 고요한 상태)

우리는 살아가는데 있어서 여러가지 속박을 받는다. 이런데서 다 벗어난다는 것을 해탈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행복을 얻었다, 자유를 얻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의 괴로움이란 행복의 반대되는 불행, 자유에 반대되는 속박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참행복, 참자유를 얻고 자하는 것인데, 참행복을 열반, 참자유를 해탈이라고 한다. 

-> 괴로움이 멸한 고요한 상태. 그 어떤 것에도 동요되지 않는것인가? 아니면 동요되었다가 사라지는 것인가?


ㄹ. 참행복(열반)의 의미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그 행복은 불행이 될 수도 있다. 행이 불행이되고 불행이 다시 행이 되는 것. 행과 불행의 두 가지를 오고 가는 행. 이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행복이다. 이렇게 행과 불행이 되풀이 되는 것을 '윤회', 돌고 돈다고 말한다. 

그러나 열반에서 말하는 행복은 행과 불행이 되풀이 되지 않고 '윤회하지 않는 행'이다. 열반=자유+행복

꺠달음을 얻게 되면 걸림이 없어진다, 자유로워진다. 마음이 초조하거나 불안하거나 들뜨거나 흥분되거나 두렵거나 하지않고 마음이 편안해진다.


(3) 나 먼저 깨닫기, 그도 깨닫기

ㄱ.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

우리는 왜 두려움과 고통 속에서 헤매고 살까? 왜 온갖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갈까? 그 근본은 무지에서 오며, 그 무지는 왜 오는가?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것과 진실이 다른 것. 다른이의 말이 있는 그대로 전달되는 것이 아닌 왜곡 되는. 


ㄴ. 내가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이 세상에서 만나는 사람은 수없이 많으며, 사람뿐만 아니라 온갖 사물을 접하기 때문에 한 명의 깨달은 자 옆에 내가 있다는것이 나한테는 큰 이익은 없다. 중요한 것은 내가 깨닫는 게 중요하다. 다른 사람이 깨닫고, 못깨닫고는 큰 관계가 없다. 나를 위해서 상대방이 깨달아야 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내가 깨달아야 되는 것이다.

물론 상대방도 깨달으면 좋다. 그를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그를 꺠달음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 좋다. 이것이 전법이다.

1. 내가 먼저 행복하고 자유롭기 2. 다음으로 행복 전하기

내가 깨닫게 되면 다른 이의 아픔에 대해서 깊은 이해가 일어난다. 이 전법은 어떤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서, 내 인기를 위해서, 이익을 위해서,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비심, 연민에 의해서 가능하다. 


ㄷ. 자기 생각에 사로잡히는 이유

자기 생각에 사로 잡히는 것은 중생의 자연스러운 정신현상이다. 모든 사물을 자기 중심에 놓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내가 인식하는 거고, 저 사람은 나와 다른 위치, 다른 관점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인식이 서로다를 수 있다는것을 이해하면 인식이 서로 달라도 갈등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를 이 우주의 중심, 세계의 중심에 놓고 자기의 인식하게 모든 것을 평가한다. 인간은 누구나 다 자기를 중심에 놓고 사물을 인식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인간 존재의 특징이다. 


ㄹ. 다 안다는 생각, 다 모든다는 생각을 내려놓아야 한다

부처님이 와도 깨닫기 힘든 사람이 있다. '나는 다 안다'는 사람이다. 그래서 병중에 제일 큰 병이 '나는 깨달았다', '나는 다 안다'는 안다 병에 걸린 사람이다. 이것과 동격인 또하나의 병이 모른다 병이다. 사로잡힘 중에서도 가장 강한 상태일 때 안다병이나 모른다병이 나타난다. 그래서 안다병, 모른다병은 적어도 놔야 한다.

내가 비록ㅇ ㅏ는 것 같아도 그것은 지실이 아닐 수도 있고, 내가 모른다면 알려고 노력해야 한다. 


ㅁ. 고통에서 우리는 구제하는 가르침, 불교

스스로 눈을 떠서, 무지에서 깨어나면 물을 필요가 없어진다. 또 딴 사람들이 그렇다고 해도 거기에 구애받지 않고, 그렇지 않다 해도 거기에 구대받지 않게 된다. 스스로 내가 그 모순을 알아 차렸기 때문에. 불교라고 하는 것은 내가 겪고 있는 이 괴로움과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것이다. 


->강가강에서 태어난 물고기가 가장 빨리 하느나라로 가겠네~/자신이 스스로가 답을 찾는것

-> 눈있는자 와서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