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수 염 고 래/공 부

불확실한 삶

두치고 2019. 5. 2. 00:45

우리가 상처를 입을 수 있다는 것. 다른 이들이 상처를 입을 수 있다는 것. 우리가 다른 사람의 변덕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는 것. 이 모두는 공포와 슬픔의 이유이다.

폭력을 이해하는 틀은 관계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반전의 행위가 내가 저지르는 폭력의 자기방어기제로서 작동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폭력의 가해자이자 연동된 자로서 조건과 행위의 관계를 사유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폭력의 경주에서 나는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가? 폭력에 폭력으로 응수하는 것이 정당할까? 폭력을 저지른 개인을 면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지구적인 정의의 조건을 떠맡을 책임을 지기 위해 질문을 제기.  어떤 조건이 무엇을 듣지 못하게 하는가?  들을 수 있는 것 너머에서 듣기. 듣기의 참여자로서 나를 위한 듣기가 아닌 . 나(우월감)를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지 않는 것.

상실과 취약성은 상실의 위협을 무릅쓰면서도 애착심을 갖는 것.. 다른 이들에 노출됨으로써 폭력의 위험에 노출된다는 점에서 유래.

더이상 폭력의 위험에 노출되고 싶지 않은 나와 관계에 기반한 취약성을 인식하며 살아가는 삶이야 말로 방향이지 않을까 생각하는 나.

내가 듣지 못했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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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는 자신이 겪은 상실에 의해, 자신이 어쩌면 영원히 바뀔수도 있음을 받아들일때 일어난다.
."내가 우리은지 얼마나 애지중지 키웠는데"라는 꿈속의 할머니의 말 한마디가, 우울감과 무기력으로 무너질 것 같은 내 삶을 지탱한다. 기적처럼 태어나 할머니의 보살핌과 사랑을 전적으로 받으며 살수 있었다. 그 보살핌이 너무나 귀해서 정신 놓고 살면 안된다는 생각이 든다. 그냥 대는대로 막 살면 안된다는 생각이 든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삶을 보면서, 나도 언젠가 죽음이 내 눈앞에 기다리고 삶을 돌아보게될 때, 다른 이들을 위해서 잘 살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면 좋겠다. 나의 행복을 위해서도 잘 살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면 좋겠다.

파괴하는 것에만 가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생태에 무언가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좋겠다. 달팽이와 지렁이가 있어서 땅이 고르고 잎이 트고 공기가 맑아지고 내가 숨을 쉴 수 있다. 그런데 '저' 달팽이는 내게 어떤 의미였을까? 몽골에서 여행객을 위해 죽어야만 했던 양과는 또 다르다. 내가 달팽이의 가는길을 침범해서 그들을 짓밟아 생을 앗았다. 저들이 나로 인해 죽었다. 우리 둘다에게 그건 사고였다. 나는 사고의 가해자이다. 폭력의 발생 빈도를 줄이기 위해서 나는 바닥을 잘 보고 걸을 수 있을 것이고 바닥이 잘 보이지ㅜ않는 밤까지 행동을 함으로써 누군가를.죽이지 않을 것이다. 모기에게 피를 내어주는 정도가 내가 생태에 기여할 수 있는 최선인가?

어떤 조건이 나를 들리지 못하게 하는가? 선택과 달성의 신화로 길들여져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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