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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렁 이 의 길/인 권 활 동 기 록 - 1 2 ~ 2 3 년

3일 동안 지하철에서 쓴 일기

by 두치고 2013. 9. 8.
결국 마지막 전화 시 두r에게 짜증을 냈다. 일년 반 이나 활동했는데 이런 사람은 처음이었다. 사사 건건 전화를 거는 것이 아닌가.. 트럭을 사겠다고 했던 철없음이 이해가 되었다. 본국에서 돈 많은 집에 태어나 오냐오냐 어머니의 그늘 아래 커온 그로서는 사사건건이 보고해야 할 일이었다. 그만큼 넉넉한 집안과 사랑을 받은
친구이기 때문에 쪼들리는 사정에도 양손 가득히 무언가를 들고 올 수 있었을테다. 그런 그의 속 깊은 사정을 헤아리지 못하는 나의 속 좁음이 반성되었다. (분명 그는 불안했던 터라 계속 전화를 했던 것일텐데. 집에서 외로이 티비만 보다가(그가 설명해준 미국인 친구 한국인 친구는 '친구'가 아니었다는 것을 안다-그의쓸쓸했던 눈동자를 통해 느꼈으니까) 두시간 반을 걸려 온 난쎈과 그를 반겨줄 것이라 기대했던 멤버들로부터 -익숙한 얼굴이-떠났다는 것에 대한 작은 실망감과 마지막 나의 짜증에 그의 돌아가는 두시간 반 길은 어땠을까

이것이 국짱님이 이야기하는 전인적 회복이라는 것인가?그들를 대하는 태도, 눈빛, 그런 것들이 전인적 회복을 일구는가? 무조건 적인 희생과 나의 감정을 억누르고 언제나 좋은 상태로 그들을 대하고 마주하는 것이 그들의 회복을 돕는 것인가? 그렇게 하고 객관적 관계-에 가까운-로의 맺음은 어떠한가? 내가 꿈꾸는 전문가 상은 무엇인가? 정말 전적으로 거짓을 보이며-그들에 대한 솔직한 감정의 드러냄 없이 늘 좋은 상태의 유지-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에 대한 안좋은 점들만을 이야기하는 것? 또는 정말 친구같은-? 이게 가능할지 모르겠다.- 경계없는? 그 무엇도 단정 지을 수 없는 관계의 형태이다.



어떨땐 솔직해야하고 어떨땐 그렇지 않아야하며 어떨땐 서비스/지원를 제공하는 객관적 역할을 다하여야하고 어떨땐 상호작용하는 친구같기도해야한다.
고문생쫀자를 위한 상담 워크샵 시 개인적 시간과 적정선의 유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그것은 사회복지를 공부함에 있어서도 그랬다.
문제는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이다.

한편으로는 전인적 회복을 위해 당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 라는 의문이 들었다
감사한 것은 아무능력도 없는 내가-심지어 소양도부족한 내가 이곳에 있을 수 있게 해주신 기회이며 남을 수 있었던 기회이다. 언제든 이 기회를 박탈 당할 수 있지만..
그것외에는 활동가의 교육을 위해 하지 않았던 노력 또는 난민 한 분 한 분 모든 분들께 너무나 사무적인 그의 태도를 보며 -그러면서 활동가가 이곳에 평생을 있기를 원하고 목숨을 바치기를 원하고 희생을 원하고
그런 것들이 화가 났다.
너무 화가났다.
지금 사무실 거실에 가득 참 케이스들에 대한 중압감을 느끼는지 너무나 쉽게 케이스를 자른다는 이야기를 이야기를 먼저 해버리는 태도가 무책임하게 다가왔다.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런 상황을 막기 위한 대안을 찾아야 하는 것 아닌가?


itistory-photo-1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전인적 회복의 단계에서 '어떻게'가 없는, 추상적 관념에서의 태도만을 강조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당신도 평생 머무르지 않을 이곳에서 평생의 활동가들을 모을 꿈을 꾸는 것 자체가 -그 어떤 활동가에 대한 노력 없이- 환상으로 다가 온다.

대책과 대안. 튼튼한 대책과 대안을 마련해두어야 한다. 그 구조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전문가로써의 방법으로,프로 다워야 한다.

9시까지가 아닌 이른 시간으로의 출근을 활동가에게 요구하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업무시간에 업무시간 외의 것들을 하는 것을 방종과 나태로 볼 것인가. 신뢰와 자유로 볼 것인가.

앞으로의 6개월 또한 내가 난센을 판단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2.
-상처받은자의치유 고문피해자센터-를 읽으며 밥을 먹으러가는 것 조차 신뢰를 잃을 수 밖에 없엇던 고문의 후유증으로 아직까지 사람들을 믿을 수 없는 것에 있어. 나는 그들을 바뀌엇으면 하는 생각에 사로 잡혔다. 고문. 그 단어만으로도 끔찍함이 파생된다.

3. 미쉘푸코의 사상을 좇아가는 길은 나를 더욱 모호히, 산산조각 내는 일이다. 그를 20년 연구한 그 또한 모든 사고과정에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는 모습을 보며. 어쩌면 공부해나갈수록 말랑말랑한그의 태도가 귀엽고 존경스러웠다. 귀감이 되는 첫 시작이다.

어떨땐 솔직해야하고 어떨땐 그렇지 않아야하며 어떨땐 서비스/지원를 제공하는 객관적 역할을 다하여야하고 어떨땐 상호작용하는 친구같기도해야한다.
고문생쫀자를 위한 상담 워크샵 시 개인적 시간과 적정선의 유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그것은 사회복지를 공부함에 있어서도 그랬다.
문제는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이다.

한편으로는 전인적 회복을 위해 당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 라는 의문이 들었다
감사한 것은 아무능력도 없는 내가-심지어 소양도부족한 내가 이곳에 있을 수 있게 해주신 기회이며 남을 수 있었던 기회이다. 언제든 이 기회를 박탈 당할 수 있지만..
그것외에는 활동가의 교육을 위해 하지 않았던 노력 또는 난민 한 분 한 분 모든 분들께 너무나 사무적인 그의 태도를 보며 -그러면서 활동가가 이곳에 평생을 있기를 원하고 목숨을 바치기를 원하고 희생을 원하고
그런 것들이 화가 났다.
너무 화가났다.
지금 사무실 거실에 가득 참 케이스들에 대한 중압감을 느끼는지 너무나 쉽게 케이스를 자른다는 이야기를 이야기를 먼저 해버리는 태도가 무책임하게 다가왔다.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런 상황을 막기 위한 대안을 찾아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전인적 회복의 단계에서 '어떻게'가 없는, 추상적 관념에서의 태도만을 강조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당신도 평생 머무르지 않을 이곳에서 평생의 활동가들을 모을 꿈을 꾸는 것 자체가 -그 어떤 활동가에 대한 노력 없이- 환상으로 다가 온다.

대책과 대안. 튼튼한 대책과 대안을 마련해두어야 한다. 그 구조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전문가로써의 방법으로,프로 다워야 한다.

9시까지가 아닌 이른 시간으로의 출근을 활동가에게 요구하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업무시간에 업무시간 외의 것들을 하는 것을 방종과 나태로 볼 것인가. 신뢰와 자유로 볼 것인가.

앞으로의 6개월 또한 내가 난센을 판단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2.
-상처받은자의치유 고문피해자센터-를 읽으며 밥을 먹으러가는 것 조차 신뢰를 잃을 수 밖에 없엇던 고문의 후유증으로 아직까지 사람들을 믿을 수 없는 것에 있어. 나는 그들을 바뀌엇으면 하는 생각에 사로 잡혔다. 고문. 그 단어만으로도 끔찍함이 파생된다.

3. 미쉘푸코의 사상을 좇아가는 길은 나를 더욱 모호히, 산산조각 내는 일이다. 그를 20년 연구한 그 또한 모든 사고과정에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는 모습을 보며. 어쩌면 공부해나갈수록 말랑말랑한그의 태도가 귀엽고 존경스러웠다. 귀감이 되는 첫 시작이다.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