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당신과 나의 '사이'에 숨어 있습니다. 나는 지금 하나의 '사이'를 이해하기 위하여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여백은 무엇인가요? 당신과 나의 '사이'에서 무엇을 비워야 한다는 것인가요? 마른 공허들이 흙바닥 위에서 뒹굴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하루 종일 길을 걸어 왔습니다. 당신과 나의 '사이'에서 새떼가 날아가고 당신과 나의 '사이'에서 버려진 마을을 보았습니다. 「나는 천천히 당신과 나의 '사이'에 길들여지고 있습니다. 길들여진다는 건 우리가 간신히 이름 붙인 것들에 시간이 다시금 이름 붙이는 것을 목격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어떤 시간의 '사이'를 바라보는 일일까요?」확실성을 추구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고 내 육체는 확실하지 않아서 자주 영혼을 공모하였습니다. 불가사의한 의미를 깨우기 위하여 나는 나의 언어들과 문장들에게 수도 없는 생의 근거를 제시해야 했습니다. 내 안의 뻔뻔하고 추하고 속물스러운 것들은 모두 내 언어들이 나에게 하는 구애라는 것을 묵묵히 견뎌야 했습니다. 내가 밤마다 글을 쓰며 당신의 몸 한가운데 숨겨놓고자 했던 언어들은 당신과 나의 '사이'에 있는 혼수상태였습니다. 나로 인해 당신과 나의 '사이'에서 우리는 그 깊은 혼수를 견뎌야 했습니다. 그러고 나면 당신과 나의 '사이'에는 매번 새로운 언어를 만났습니다. 당신은 내 언어에 사는 섬이었고 당신을 만나서 나는 내 언어의 '사이'에 수많은 섬을 길들였습니다. 당신과 나의 '사이'에 놓은 그 깊은 물속으로 지금 이 시간이 길들여지고 있습니다. 길들여진다는 것은 당신과 나의 '사이'에서 시간이 수명을 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신과 나의 '사이'에서 다시 바람이 불고 아무도 모르는 울음들이 모래로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제 붉음을 다해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당신과 나는 무릎이 닮아 있었습니다. 당신과 나는 새끼손가락이 둘다 아주 길었습니다. 당신은 내 방에서 책을 보다가 고양이처럼 잠들었고 나는 당신의 방 안에서 창문을 열고 몰래 담배를 피운 적이 있습니다. 당신과 나는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던 날 동시에 서로 좋아하는 숫자를 물었습니다. 당신은 언제나 발에 꼭 맞는 분홍색 구두를 샀고 점원이 무릎을 꿇고 구두를 신겨주면 금세 얼굴이 빨개지곤 했습니다. 당신은 일요일 아침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운동복 차림으로 슈퍼에 들어가 우유를 사들고 오는 모습을 내게 보여주고 싶어했습니다. 당신은 언제나 내게 '이 세상에 없는 영화관의 주소' 같은 시를 써달라고 했고 당신은 시골 버스를 타고 가면서 창문으로 내 옆모습을 훔쳐보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당신과 나는 자주 이번 생에 목격되었고 이번 생을 실컷 훔쳐보고 가자고 해변에 누워 KGB 맥주를 부딪쳤습니다. 당신은 귀고리 한 알을 자주 잃어버리는 습관이 있었고 나는 당신에게 물빛에 가까운 귀고리 한 알을 자주 사주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당신과 나의 '사이'에 해가 지고 바람이 불고 하늘에서 저녁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당신과 나의 '사이'에서 나는 숨어 있습니다. 당신과 나의 '사이'에서 누런 눈물이 잠들지 못하는 가축의 눈을 적시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사랑은 일생을 다해 한 사람과
한 사람의 사이에 놓여 있는
여백입니다.
『passport FROM GOBI TO SIBERIA 김경주 산문집』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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