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지성 여성주의 장애학 연구자의 강연 메모를 보고 배우는 점들-현실정치가 아닌 인식론적 관점에서의 접근
1. 운동은 어떤 질문을 던질 것인가?
2. "남성의 관점으로부터 여성, ‘나’를 정의하지 말고, 서구(이성애자, 백인, 비장애인, 부자, 서울사람…)와의 관계로부터 ‘우리’를 정의하지 말자는 것이다 … ‘진정한 우리’, ‘진정한 여성’은 없다. 여성주의가 주장하는 것은 서구/남성의 대립항으로서 ‘우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로 이행하는 것이다. 여성주의는 서구/‘우리’, 남성/여성이라는 이분법 자체가 서구/남성의 권력이라고 보는 대표적인 탈식민주의 사상이다." -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중에서
황 연구자는 여성주의가 여성만을 위한다는 오해와 달리, 성별로 권력을 나누는 총체적인 체계를 분석하고 비판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밝혔다. 따라서 장애를 여성주의적으로 본다면 장애를 특수화하기보다 장애-비장애를 가르는 권력체계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 난민-비난민을 가르는 권력체계를 보자!
여성주의는 거듭되는 질문을 통해 성적 차이로 구성된 사회 구조가 여성과 남성의 생물학적 차이 혹은 자연의 섭리로 자연스럽게 나타난 게 아니라는 것을 드러낸다. 오히려 그 뒤에 여성과 남성을 구분하고 억압, 배제하는 권력이 있음을 폭로한다.: 난민과 비난민을 구분하고 억압, 배제하는 권력은 무엇인가?
3. 황연구자에 따르면 사회 구성원을 장애-비장애로 나누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남들과 다른 몸으로 말미암아 장애인은 비장애인과 구분되는 듯하다. 또한 비장애인 중심사회에서 겪는 억압의 경험은 장애인을 ‘장애인’으로 위치 짓는 요인들이다.
그러나 연구자의 표현에 따르면 "장애는 다른 어떤 차이들과 떨어진 독자적인 차이는 아니다." "장애의 범주는 잘 정의되기 어렵다" "장애인이라는 정체성이 절대적이지 않다" 사실, 난민의 범주 또한 차이는 있겠지만 마찬가지다. 여러 사회적인 상황에 따라 본인이 지닌 차이는 장애로 구성될 수 있다는 것.(언어소통이 불가능한 외국인이 어느사회에서는 장애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는것 처럼)
장애에 대한 억압이 심한 사회일수록 그 장애인이란 정체성이 강하게 드러날 수밖에 없잖아요. 다른 사회적 억압 중에서도 장애가 강력한 억압의 원인이 되고, 그래서 장애인이라는 게 강력한 정체성으로 드러나는 건 맞아요. 그런데 실상 정체성을 구성하는 문제는 지금 장애운동이 강력한 정체성 정치를 하는 것(‘당사자주의’)만큼 단순한 문제가 아니죠.
"우리 사회에서 가장 억압받는 사람은 누구인가? ‘가난한’+‘장애’+‘여성’인가? 장애여성은 일주일에 3일은 장애인으로 살고, 나머지는 여성으로 살아가는가? … ‘공감’에서 레즈비언 인권 운동가를 초청하여 강의를 들었는데, 반응이 굉장히 좋았다고 한다. 강좌에 참석한 중증 장애여성들은 자신보다 ‘못한’ 처지의 사람은 세상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자신조차 누군가에게 가해자(이 경우에는 동성애 혐오증)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으며,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복잡한 방식으로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정체성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맥락으로 구성된다." -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중에서
사회적 상황과 계급·젠더·인종·국적·종교·장애유무 등에 따라 유동하는 '난민'을 생각해볼 수 있다. 청각 장애인이 자신을 청인으로 생각하거나, 만성질환이나 나이듦으로 인해 장애범주에 속하는 이들이 장애인으로 자신을 생각하지 않듯/ 난민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난민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 난민의 상황에 있다고 볼 수있지만, 계급이나 여러가지 난민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을 이유로 심사를 거쳐 해당 지위(비자)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또는 제도나 난민신청자에 대한 담론을 내면화함에 따라 "G1비자를 가진 사람들은 난민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장애(경험)가 남성에게는 역동성과 연결되는 남성성의 상실을/여성에게는 소극성의 강화를 가져왔다면, 과연 '난민'은 어떨까? 장애에 비해 '난민'은 신체의 기능과는 다른 사회적 기능의 단절이라는 패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분석은 여러 기준으로 난민의 위치를 볼 수 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나이듦이 장애범주에 들어갈 수 있냐의 논쟁도 있겠지만, 북미에서는 나이듦을 장애범주에 넣는 것을 고려하지 않은 이유가 '할 수 없음'의 나이듦이 장애로 연결될 수 없다는 것인데, 오히려 나이 듦으로 말미암아 사회적으로 뭘 못하게 되는 것도 문제를 제기해야죠. 누구나 사람은 나이 드는데, ‘나이 들면 아무것도 못 한다’고 여기는 것은 이 사회에서 부여한 신체적 규범인 거죠. 나이 듦과 장애를 구분하려 들지 말고 공통적인 운동의 목표를 찾아야 한다고 웬델이 이야기해요.
이 지점에서 번뜩이는 지점은, 장애의 범주를 규명하고 누구를 포함하느냐 마느냐의 논의를 하는것 말고도/또는 보다- 장애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는 유사한 경험들?상황들을 아우르는 '공통의 목표'를 찾는 것이다. 지금으로서 생각나는 것은 "의존성"에 대한 이야기가 될 수 있겠다. 사회적으로 '짐'으로 낙인된 것들에 대해 이야기해볼 수 있지 않을까
4. 문화적 장애가 여러 의미가 있는데, 문헌을 보면 외국에 트랜스어빌리티(transability)라고, 트랜스젠더가 성별을 변경하듯 트랜스어빌리티는 소위 ‘멀쩡한’ 내 몸을 장애로 전환하겠다는 거에요. 스스로 몸을 절단하거나 청력을 상실하거나 하는 걸 원해요.
5. 퀴어 쪽은 비교적 제도화되지 않았잖아요. 반면 장애는 사회 복지적으로 강력하게 제도화가 이뤄졌고, 우리나라도 장애인복지법에서 15~16개 장애 범주가 있죠. 이런 제도화된 범주가 되게 강력해서, 마치 장애라는 고정된 범주가 있는 것 같죠. 퀴어는 그렇지 않은 동네라 범주 논쟁이 더 잘되는 것 같아요. 퀴어 쪽은 법이나 제도로 범주가 구획되지 않은 곳이기도 해서, 무궁무진한 논쟁이 이뤄지고 있어요.
장애에 대한 관점/접근방식
“(정치적·관계적 모델을 제시하는 것은) 장애인에 누가 포함되는지를 끊임없이 질문하며, 특정 부류의 사람들을 임의로 장애로 규정하는 것에 저항하기 위함이다.” “장애범주를 넓히는 노력은 장애가 의료적 범주에만 갇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엘리슨 케이퍼
모든 건 정치라는 것이고, 손상이든 생물학적으로 고정된 것으로 보이는 실체 모두가 ‘정치적’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정치적이란 건 사회 내 권력관계와 맞물린다는 의미이기에 또한 관계적이죠. 그렇기에 정치적·관계적 모델에서 보는 장애는 고정된 정체성이 아니라 유동적이다.
요즘 장애등급제 투쟁을 생각해보죠. 정부는 끊임없이 의료적 기준으로 등급을 나누는 게 옳다고 하잖아요. 근데 장애인이라는 범주를 우리가 생각하는 최대치만큼 확 넓혀버리면, 의료적 모델에 갇히는 문제를 뛰어넘을 수 있겠죠. ‘장애가 꼭 어떤 신체적인 문제만은 아니다’, ‘사회적인 것도 고려하고, 여러 가지를 고려해야 한다’가 되기 때문이죠.
황 연구자는 "이 모델은, 장애를 고정된 정체성으로 묶어두지 않고, 몸의 불안정성과 함께 유동하는 것으로 사고하자는 건데요." “모든 사람의 몸은 불안정하다. 어떤 외부의 오염이나 손상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운 몸은 하나도 없다.”라며 "오히려 완전하다고 말하는 너희가 (모든 사람의 몸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못 보고 있다는 걸 말이죠. 그리고 사람의 몸이 완전하다고 하는 바로 그게 이데올로기, 정상신체 중심주의이자 권력이라고 말할 수 있겠죠."
"불완전성에 대한 인식은 연대 가능성을 열어주기도 하죠. 이를테면 트랜스젠더라는 존재를 놓고 보면, 단순히 남성이든 여성이든 성별은 내가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문제는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을 두 개의 성별로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거기에 맞는 몸만이 정상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권력이고 문제라고 말하는 정치학이어야 하죠"
"밑에서는 발을 동동 구르지만, 위에서는 고상한 백조처럼 현실투쟁과 이상을 같이 가져가는 작업이 필요한 것 같아요. 이렇게 하는 게 운동에서 오는 지침을 막는 방법인 것 같습니다."
"장애인의 삶에 대한 전반적인 무지, 장애에 대한 공포, 장애가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현상이라고 보는 전제가 장애를 예방하려는 욕망에 기여한다." - 수전 웬델, ‘거부당한 몸’ 중에서
“장애인은 비장애인이 가지지 못하고 접근할 수 없는 경험과 지식을 갖는다. 이러한 지식에는 고통 받는 몸으로 사는 방법에 관한 것이 있고, 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매우 실제적이고 중요한 지식이다. 그 지식은 우리 문화를 확장시키며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것이다”- 수전 웬델
"정체성의 정치와 장애 범주가 필요한 부분이 있잖아요. 그게 현실적 부분에서 그런데요. 그 정체성의 정치가 오히려 장애인을 억압하는 논리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가는 게 문제고, 그걸 해체하는 게 중요하겠다는 말씀을 드리고자 했던 거에요." 우리가 결국 해체해야 하는 건 장애와 비장애를 이분화하는 그 논리 자체라는 건데요. 모든 몸은 다들 죽기 전까진 수많은 시련의 연속이고, 소위 말해 ‘완전한 몸’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 거잖아요. 그렇기에 마치 완전한 몸과 불완전한 몸이란 게 딱 떨어져 구분되는 것처럼 구획 짓는 것들을 비판할 필요가 있어요. 오히려 그 이분법에 편승해서 동정과 시혜를 말하고, ‘장애는 특수하다’고 말하는 그것이 장애인운동을 망하게 하는 길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 동정과 시혜를 말하지 않더라도, 장애를 특수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정말 운동을 망하게 하는 것일까?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이어서, 이걸 고민으로 앞으로 가져가 잘 풀어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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