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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분 에 물 주 기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알랭 드 보통

by 두치고 2011. 10. 26.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알랭 드 보통


 

  알랭 드 보통! 아, 알랭 드 보통! 매번 책을 읽은 후에 작가를 찬양하게 되는 나를 의심해 봐야하는 걸까? 알랭 드 보통이 25살 때 썼다는 이 글은, 내가 그 때의 그와 비슷한 시기를 살아가기때문에, 아니 무엇보다도 그의 글 속에서 넘치는 위트와 철학적 관점으로 풀어내는 연애와 사랑에 대한 고찰에 깊은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사실 알랭 드 보통의 글은 바라나시에서 뒹굴거리다가 손에 닿아 읽게 되었던 적이 있다. '여행의 기술'이었는데, 사실. 그저그랬다. 그래서 기대를 하지 않았던 것일 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느날 무언가에 홀린 듯 해야할 일을 다 뒤로 미루고서는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 '나는 도대체 왜 너를 사랑하는가'에 이끌리게 되었다. 내가 이 책과 연애에 빠지게 된 가장 이유는 3가지가 있는데 그 첫번째는 책 사이사이에 깃들어 있는 선, 숫자, 그림들이다. 그것들은 이야기 속에 숨어 있는 메세지이며 수백개의 단어들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이다. 보통은 천재인 것 같다.
 내가 이 책과 연애를 하게 된 또 다른 이유는,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의 답의 모티브였던 칸트적 아름다움, 알랭 드 보통을 통해 칸트를 보는 즐거움이 있었다. '나는 네가 너 이기에 사랑한다.' 그것은 칸트가 이야기했듯이 외적인 것의 가변성에 결코 종속되지 않는다. 그것은 깊이 생각하고 있어왔던, 모든 이들이 갈망하는 어쩌면 칸트를 통한 나름대로의 '플라토닉러브'일 것이다. 그는 클로이의 치아를 통해 아름다움을 관철하고 글로써 그려낸다. 사실 그가 이야기하는 아름다움, 칸트가 이야기하는 아름다움에는 도올이 이야기했던 아름다움과 일맥상통한다. 결국 아름다움 속에는 추함이 있다. 모든 것은 조화를 향해가며, 완벽한 아름다움 일명 '플라톤적 아름다움'은 압제이고 피로이며 독단적이다. 
클로이의 치아. 내가 이 책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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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이란 결국 다른 사람에게 설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다른 사람에게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결론을 보여줄 수 있는 수학공식하고는 다르다.

★★★★★나는 나의 욕망의 은밀함, 까다로움, 누구도 클로이의 치아가 나에게 주는 의미를 짐작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좋아했다. 그녀는 플라톤주의자의 눈에는 아름답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각도에서는 추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의 아름다움에는 플라톤적으로 완벽한 얼굴에는 없는 것이 있었다. 아름다움은 추함과 고전적 완벽성 사이의 동요의 영역에서 발견된다.
완벽함에는 어떤 압제 같은 것이 있다. 심지어 어떤 피로 같은 것이 있다. 보는 사람에게 창조적 역할을 거부하고, 전혀 모호함이 없는 진술이 가지는 독단성으로 밀고 들어오기 때문이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흔들리기 때문에 측정이 불가능하다. 그것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각도는 얼마 되지 않는다. 어떤 빛에서나, 어느 때에나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진정한 미는 아슬아슬하게 추를 희롱한다. 비례의 수학적 규칙에 편안하게 안주하지 않고 모험에 나서서, 추로 미끄러질 수도 있는 바로 그 영역에서 매력을 발산한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고전적으로 아름다운 여자는 남자에게 상상력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고 갈파했다. 클로이의 치아 사이의 틈이 나에게 그렇게 유혹적으로 보인 것은 그것이 아마 나의 상상력을 자극했기 때문일 것이다. 내 상상력은 그 좁은 공간에서 노는 것을 즐겼다. 그 틈을 닫았다가 다시 열어보기도 하고, 내 혀로 그곳을 어루만져보기도 하고. 그 틈 덕분에 나는 클로이의 치아의 특징들을 조정하는 역할을 맡을 수 있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헝클어져 있었기 때문에 창조적 재배치가 가능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미의 증거와 추의 증거가 모두 있었기 때문에, 나의 상상력은 아름다운의 위태위태한 실마리를 붙들고 놓지 않는 역할을 맡을 수 있었다. 클로이의 얼굴은 그 모호함 때문에 비트겐슈타인의 오리-토끼와 비교할 수 있었다.
고전적인 비례를 갖춘 사람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데에 무슨 독창성이 있을까? 반면 치아 사이의 간격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데에는 분명히 더 큰 노력, 좀더 프루스트적인 상상력이 필요하다. 클로이가 아름답다고 생각할 때 나는 분명한 것에 안주하지 않았다. 나는 어쩌면 그녀의 이목구비에서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녀의 영혼으로 그녀의 얼굴에 생기를 불어넣었던 것이다.
 






그렇다. 주인공은 클로이의 아름다움을 보았고, 그것의 뿌리는 사랑이었다. 

이 책과 연애를 하였던 마지막 이유는, '유머감각'이었다. '유머감각'은 '유머감각'이 바닥을 치는 나로써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두 사람의 차이를 극복 할 수 있는 지혜. 그 나름의 해답을 찾은 보통은 보통이 아니었다.(ㅋㅋ) 그래서 그의 글과 생각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지난 관계들과 차이 속에서 무엇을 보았던가. 나는 무조건 적으로 이해하려고 하였던 것 같다. 자유론과 사랑의 사이에서 나는 어쩌면 밀의 자유주의와 일치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어렵다고 넘어갈 부분에서 그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풀어내고 있다. 두려움을 넘어서 삶을 바로 보고 있는 그의 용기와 노력. 사랑 속에서 개인을 넘어 정치와 국가까지 볼 수 있는 그의 사고의 영역은 어디까지일까. 다양한 영역에서의 어떤 사고의 귀감이 된다. 








-어떤 사람을 알아간다는 것이 늘 상식적인 생각처럼 유쾌한 과정은 아니라는 것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기분 좋은 유사성과 마주칠 수 있는 가능성만큼이나 위협적인 차이와 만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클로이의 구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면서, 나는 순간적으로 그녀의 어떤 면들은 알고 싶지 않다는 욕망을 느꼈다. 그런 면
들이 내가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부터 내 상상 속에서 구축되어온 아름다운 이미지를 거스르지 않도록.
 
자신의 생각이 반영되기를 기대하면서 상대의 눈을 찾지만, 결국은 [희비극적인]불일치로 끝나버리는 순간ㅡ 그것이 계급투쟁의 문제이건, 구두 한켤레의 문제이건. 모든 사랑 이야기에는 이런 순간들이 있지 않을까? 
가장 사랑하기 쉬운 사람은 우리가 얼굴이나 목소리에서 읽을 수 있는 것 외에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이야기가 어쩌면 맞을지도 모르겠다.
 
위협적인 차이는 중요한 점[국적, 성, 계급, 직업]에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취향과 의견이라는 사소한 점에서 형성되었다.
 
왜 공동체, 사랑, 형제애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하는 나라들은 보통 그들의 주민 상당 부분을 학살하게 되는 것일까?
사랑이 고통스러워 지는 것은 기준 때문이다. 구두가 날아다니고 이혼소송이 제기되는 것은 이웃A를 B로 바꾸려고 할 때이다.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과 시간이 드러내는 현실 사이의 이런 간극으로부터 초조함, 완벽주의, 그리고 마침내 편협함이 싹튼다.
나는 너에게 관심이 있기 때문에 네 속을 뒤집어 놓는다. 나는 네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비전을 제시함으로써 너에게 영광을 주었으니 이제 너에게 상처도 주겠다.
나는 너를 안다, 따라서 너를 소유한다.
 


편협함은 두 가지 요소에서 시작된다. 하나는 무엇은 옳고 무엇은 그르다는 관념이다. 또 하나는 상대가 광명을 보지 못한 상태에서 살아가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는 관념이다.
말다툼은 차이의 정당성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자신의 관점을 수용하도록 강제하려는 실력 행사로 전락했다.
개인적 판단이 보편화되고, 그것이 자신의 여자친구나 남자친구에게 적용되는 순간, 나는 이것이 좋다고 생각한다가 나는 너를 위해서도 이것이 좋다고 생각한다로 바뀌는 순간. 어떤 사항들에 대해서 클로이와 나는 각자 옳은 것을 알고 있다고 믿었고, 그런 믿음이 있기 때문에 서로에게 보편적 진리를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와 클로이의 관계가 공포정치 수준에 이르지 않았던 것은 아마 우리가 사랑과 자유주의 사이의 선택에서 다른 관계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하물며 사랑의 정치인들에게서는 더욱더 찾아보기 어려운 재료를 넣어서 반죽할 수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국가든 남녀든 그 재료만 있다면 편협함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 재료는 다름아닌 유머 감각이다.
유머가 있으면 직접적으로 대립할 필요가 없었다. 자극물 위를 미끄러져 넘어갈 수 있었고, 그것을 향해서 비스듬하게 눈을 찡긋 할수 있었고, 실제로 말을 하지 않고도 비판을 할 수 있었다. 차이를 농담으로 바꿀 수 가 없다는 것은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표시[적어도 사랑의 90퍼센트를 이루는 노력을 하고 싶지 않다는 표시] 이다.










그 외 좋았던 부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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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특유의 거리와 우월성 때문에 지식인은 단지 연인의 적이 아니라, 국가의 적, 대의명분의 적, 계급투쟁의 적이라는 오명을 얻게 된다. 
전통적인 이원론에서, 생각하는 사람과 사랑하는 사람은 스펙트럼의 양 끝에 앉아 있다. 생각하는 사람은 사랑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그냥 사랑을 한다. 나는 손과 입술로 클로이의 몸을 쓰다듬는 동안 어떤 잔인한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클로이는 마음이 편치 않았을 수도 있다. 생각이란 판단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 판단이라고 하면 무조건 부정적인 내용일 것이라고 생각할 만큼 편집증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벌거벗은 상태 때문에 모든 상처받을만한 일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는 침실에서 생각은 늘 수상쩍은 것이 된다. 성기의 크기, 색깔, 냄새, 작용을 중심으로 다양한 콤플렉스들이 생겨난다는 것은 뒤집어 말하면 침실에서는 모든 평가적 판단을 흔적도 없이 없애버려야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침실에서는 연인들의 생각의 소리를 삼켜버리는 숨소리, 나는 정열에 사롷잡혀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어라는 메시지를 확인해주는 숨소리만 들린다. 나는 키스한다, 고로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이 사랑을 나누는 행위를 둘러싼 공식적 신화이다. 침실은 두 사람이 서로에게 그들의 벌거벗은 상태를 그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불가사의를 일깨우지 않겠다고 암묵적으로 동의한 특별한 공간이다.
 
클로이와 내가 시작했던 율동감 있는 템포는 곧 절정에 이르렀다. 사타구니는 체액 때문에 미끌미끌했으며, 머리는 땀으로 흠뻑 젖었다. 우리는 흥분에 몸을 맡긴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 죽음과 같은 희열에서 정신과 육체는 결합되어 있었다. 진짜 죽음에서 정신과 육체가 결합되어 있는 것[또다른 종류의 얌전빼는 자들이 오랫동안 분리를 추구해왔지만]과 마찬가지였다. 이 희열은 기록된 시간 너머의 공간이었다. 압축되어 있지만 팽창적이고, 주마등 같고, 다양한 형태이고, 지극히 인간적이었다. 모든 구문과 법칙의 해체였으며, 언어의 코르셋이 터지며 쏟아져나오는 비명, 의미를 넘어, 정치를 넘어, 금기를 넘어, 물처럼 흐르는 망각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비명이었다.
 





-당신이 지금 나를 사랑한다면, 그것은 당신이 내 전체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내 전체를 보지 못하고 있다면, 언제 당신이 내 전체를 보게 될까 초조해하며 당신의 사랑에 익숙해져가는 것은 바보짓이다. 이것이 마르크스주의자의 생각이다.
만일 사랑하는 사람이 어떤 우연에 의해서 그들을 좀 좋게 생각한다면[함께 자고, 웃음을 지어주고, 아침을 준비한다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우선 그런 목가적인 풍경을 부수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것을 환영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신이 그런 것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둘 다 똑같은 의존적 요구들을 공유하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애초에 우리는 그 요구 때문에 상대에게 끌렸다. 우리 내부에 부족한 것이 없다면 우리는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상대에게 비슷한 부족상태가 존재하는 것을 보면 기분이 나쁘다. 답을 찾을 것으로 기대했는데, 우리 자신의 문제의 복제품만 발견하게 되었으니까. 우리는 상대 역시 우상에 대한 요구가 절실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사랑하는 사람 역시 우리과 같은 무력감을 피하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된다. 따라서 업는 동시에 업히는 책임을 떠맡기 위해서는 신과 같은 존재에 대한 찬양과 숭배 뒤에 숨고자 하는 어린아이 같은 수동성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알베르카뮈는 우리가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것은 그 사람이 밖에서 보기에는 육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모두" 아주 완전해 보이고, 주관적으로 자신을 보면 몹시 분산되어 있고 혼란스럽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일관된 전개, 안정된 인격, 고정된 방향, 주제의 통일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환각을 통해서 상대방으로부터 그런 장점들을 만들어낸다.
 
지나친 연약성과 지나친 독립성 사이의 균형. 나는 그녀에게서 내 자신 안에서 생겨날까봐 두려워하는 의존성을 비난했다. 그러나 연약성이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건, 독립성 역시 그 나름의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클로이에게는 어려운 과제가 있었따. 나의 독립성을 위험에 빠뜨릴 만큼 연약해서는 안 되고 동시에 내의 연약성을 부인할 만큼 독립적이어서도 안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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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백년 뒤의 몽테뉴 역시 무엇이 사랑을 자라나게 하느냐에 대해서 그 시인들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따. 몽테뉴는 말했다. "사랑에는 우리를 피해서 달아나는 것을 미친 듯이 쫓아가는 욕망밖에 없다." 아나톨 프랑스 역시 "우리가 이미 가진 것을 사랑하는 것은 관례적이지 않다"는 말로 같은 입장을 보여주었다. 스탕달은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것이라는 두려움을 기초로 해서만 생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드니 드 루주몽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가장 넘기 힘든 장애를 가장 좋아한다. 그것이 정열을 강하게 불태우는 데에 가장 적합하기 때문이다." 롤랑 바르트는 욕망을 정의상 얻을 수 없는 것에 대한 갈망으로 한정시켰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연인들은 갈망과 짜증이라는 두 극단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일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사랑에는 중간이 없다. 사랑은 단순히 방향일 뿐이며, 바라는 것을 붙잡고 나면 그 이상 바랄 수가 없다. 따라서 사랑은 충족이 되면 스스로 타 사라지고, 욕망의 대상을 소유하면 욕망은 꺼진다. 클로이와 나는 바로 그러한 마르크스주의적인 나선의 덫에 걸릴 위험이 있었다. 한쪽의 사랑이 늘어나면 다른 쪽의 사랑은 줄어들고, 그런 식으로 나선형을 그리며 나아가다 결국 망각으로 사라져버릴 위험.
 
대부분의 관계에는 보통 마르크스주의적인 순간[사랑이 보답받는 것이 분명해지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을 어떻게 헤치고 나아가느냐 하는 것은 자기 사랑과 자기 혐오 사이의 균형에 달려 있다. 자기 혐오가 우위를 차지하면, 사랑의 보답을 받게 된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이런저런 핑계로]자신에게 잘 맞지 않는다고 [자신의 쓸모 없는 면들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잘 맞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다. 자기 사랑이 우위를 차지하면, 사랑이 보답받게 된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수준이 낮다는 증거가 아니라,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존재가 되었다는 증거임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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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마시멜로해. 그때부터 사랑은, 적어도 클로이와 나에게는, 이제 단순히 사랑이 아니었다. 그것은 입에서 맛있게 녹는, 지름 몇 밀리미터의 달콤하고 말캉말캉한 물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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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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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아주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하는 말을 이해하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제대로 말을 할 수 없다는 것도. 본질적으로 우리는 사랑을 받기 전에는 온전하게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클로이를 통한 "나"의 확인
클로이라는 존재가 제공하는, 내 존재에 대한 좀더 깊은 통찰로 인해서 가능해진 일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구태여 관심을 가지려고 하지 않는 성격의 측면들, 다른 사람들은 대면하기 어려울 수도 있는 측면들을 지적하는 데에는 연인의 친밀성이 필요하다. 클로이는 나에게 내가 방어적이라거나, 비판적이라거나, 적대적이라거나, 질투를 한다거나, 딱할 정도로 아이처럼 군다는 식으로 온갖 부정적인[그러나 사실인] 면들을 아주 솔직하게 말하는 때가 있었다. 나의 일반적인 자기 반성에서는 [내적인 조화를 위해서]피해 갔을 측면, 다른 사람들이라면 관심이 없어서 보지 못했을 측면, 침실의 정직성이 있어야만 밝힐 수 있는 측면에 직면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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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그녀에게서 무엇을 보는가? 너는 그녀에게서 무엇을 보고 싶은가?
 
 
  - 성숙이라는 것 ㅡ잡기 힘든 목표이지만ㅡ은 모든 사람에게 그들이 받을 만한 것을 받을 만한 때에 주는 능력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자신에게 속하고 또 거기서 끝나야 할 감정과 그런 감정을 촉발시킨 사람에게 ㅡ 나중에 나타난 죄 없는 사람이 아니라ㅡ즉시 표현해야 할 감정을 구분하는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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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클로이에 대한 내 사랑이 그 순간의 나의 자아의 본질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그녀에 대한 내 사랑이 끝난다는 것은 다름 아닌 내 일부의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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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싫더한다. 이것은 나는 이런식으로 너를 사랑하는 위험을 무릅쓸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싫다는 근본적인 주장과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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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햄릿에 대한 내 대답은 사는 동시에 죽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 ㅡ내가 다시 한번 빠지기 시작했다는 것.
 
 
 
 - 어느 날 거리에서 불행한 여자 옆을 지나다가 클로이가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내가 저 여자처럼 얼굴에 커다란 점이 있었어도 나를 사랑했을 것 같아?" 그 질문에는 "그렇다"는 대답에 대한 갈망이 숨어 있다. 몸이라는 세속적인 표현,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비참하게도 어떻게 바꾸어볼 수 없는 표면보다 높은 곳에 사랑을 놓아달라는 요구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너의 재치나 재능이나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라, 아무런 조건없이 네가 너이기 때문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너의 눈 색깔이나 다리의 길이나 수표책의 두께 때문이 아니라 네 영혼의 깊이 때문이다. 연인이 외적 자산을 벗어버린 나를 좋아하고, 무엇을 이루었냐에 관계 없이 우리 존재의 본질을 평가해주고, 흔히 부모와 자식 사이에 존재한다고 말하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되풀이해주기를 바라는 갈망이다. 진정한 자아는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이다. 그외에 우리의 이마에 점이 생긴다든가, 나이 때문에 몸이 시든다든가, 불황 때문에 파산을 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우리의 표면에 불과한 것에 손상을 주는 사고들에 대해서는 책임을 면제해주어야 한다. 설사 우리가 아름답고 부유하다고 해도, 이런 것들 때문에 사랑받고 싶어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서 그것이 사라지면 사랑도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이 내 얼굴보다는 머리를 칭찬해주기 바란다. 그러나 꼭 얼굴을 칭찬해야겠다면, [정적이고 피부조직에 기초를 둔] 코보다는 [운동신경과 근육이 통제하는] 미소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해주기 바란다. 내 소망은 내가 모든 것을 잃고 "나"만 남았다고 해도 사랑을 받고 싶은 것이다. 이 신비한 "나"는 가장 약한 상태의, 가장 취약한 지점에 자리잡은 자아로 간주된다. 내가 너한테 약해 보여도 될 만큼 나를 사랑하니? 모두가 힘을 사랑한다. 하지만 너는 내 약한 것 때문에 나를 사랑하니? 이것이 진짜 시험이다. 너는 내가 잃어버릴 수도 있는 모든 것을 벗어버린 나를 사랑하는가? 내가 영원히 가지고 있을 것들 때문에 나를 사랑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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