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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분 에 물 주 기

블랙 라이크 미

by 두치고 2014. 10. 7.




p66

땀 냄새, 담배 냄새, 축축한 돌 냄새, 커피냄새가 주변에 가득 했고, 그 밑바닥에는 늘 생선냄새와 짠 바다 내음이 짙게 배어 있었다. 

그는 시각을 잃고 지낸 세월 동안 눈으로 보는 것을 벗어난 세계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이었다. 



p134

나는 공책을 꺼내 침대에 배를 깔고 누운 다음 글을 썼다. 저 바깥 미시시피의 밤 속에 펼쳐지는 죽음의 향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그러나 만족감이 들지 않았다. 나는 아내에게 편지를 쓰기로 했다. 아내에게 소식도 전해야 했기 때문에 편지를 쓰진 해야 했다. 그러나 아내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단어 하나 생각나지 않았다. 아내는 이곳의 삶과 아무 관계가 없었다. 해티즈버그에 있는 방과도, 이 방에 묵고 있는 흑인과도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다. 미칠 것만 같았다. 내 본능은 온힘을 다해 이 낯선 느낌과 맞서 싸웠다. 라이오넬 트릴링이 문화는 감옥이라고 했던 말의 의미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는 학습된 행동 양태가 너무 깊이 몸에 배어 무심결에 반응이 나오는 것을 문화라고 보았다. 흑인으로 길들여진데다 인종차별주의자가 흑인에게 퍼부어대는 온갖 성적 암시가 떠오르면서 나는 심지어 가장 친밀한 존재인 나 자신과도 격리된 채 아내와 맞닿은 모든 끈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아내와 나 사이에 얼마나 높은 벽이 가로놓였는지 하얀 백지가 모든 것을 시각적으로 말해 주었다. 관찰하는 자아가 한 흑인이 시끄럽고 냄새나는 빈민가에 틀어박혀 백인 여자에게 '사랑하는 아내'라고 글을 쓰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흑인 존재의 굴레에 묶여 더 이상 글이 씌어지지 않았다.

'백인 여자는 절대로 쳐다보면 안돼. 눈을 내리고 아래를 보거나 다른 데를 봐'

'백인 여자더러 '사랑하는 아내'라고 부르다니, 대체 무슨 생각인거야?'


 이 구절에서 나는 그가 외면 뿐 아니라, 내면까지 완벽히 흑인이 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짧은 시간의 경험이 그가 완벽히 '흑인'과 일치되었다고 이해할 수는 없는 부분이겠지만, 그 순간 만큼은 그는 흑인이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나의 활동에 대한, 내가 생각하는 어떠한 문제를 이해하고 보고 바꾸기 위해 걸어왔던 길과 그것에 대한 나의 태도에 대해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은 반성이 아닌, 어떻게 하면 어떤 것이 나에게 있어 이러한 태도와 진실을 볼 수 있게 하는 것일까 였다.




p145 P.D.의 원고 내용중..

"내 정신 상태를 깨달을 때면 소스라치게 놀랐다가 다시 건강한 웃음과 친절한 악수로 얼른 제자리로 돌아가곤 했다. 돈의 향기로운 냄새에 취하면 그렇게 된다."



p165 주인공이 12번의 히치하이킹을 했던 날, 고속도로에서 너무나 간절히 휴게소를 찾았지만 결국 돌아오는 것은 그 화장실과 물을 사용할 수 없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것에 대해 보인 태도는


"그래도 고맙습니다"


 그래도 고맙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그가 흑인이 되었을 때 일관적으로 보였던 공손한 태도이다. 이는 흑인을 오히려 배려한 처사였지 않았을까. 그가 흑인이 되었다는 것은 엄청난 책임감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비단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의 희생이 필요했고 그것을 넘어 다른 흑인들까지로 연결 되는 것이었다. 즉 자신이 한 '흑인'으로 존재하며 일상을 살아나가는데 있어서 만난 수 많은 사람들 -흑인과 백인을 모두 포함한-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흑인' 그리핀으로서의 책임이었는지 모른다. 그러한 책임감은 극도의 상황에서도 일관성있게 저러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 분명한 목적성이 있었기 때문일 것 같다.




p181 거지같은 히치하이킹의 연속 중 만난 사람에 대한 그리핀의 글

나는 그의 태도가 아이에 대한 넘치는 사랑에서 비롯되었다고 결론 내릴 수밖에 없었다. 아이를 향한 사랑이 너무 깊어서 이 사랑이 인류 전체로 흘러넘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능력이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치유해 주는지 그 남자 자신은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비 내리는 앨라배마의 밤, 타인에게 수없이 상처받고 지친 나 같은 사람에게 이런 사랑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그는 전혀 알지 못햇다.

인간이 가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은 자비심(말하자면 '카리타스'말이다. 그것도 오늘날 우리 언어에서 쓰이는 인색한 사전적 의미가 아니라 예전에 쓰이던 포괄적인 의미의 카리타스를 나는 말한다)과 형이상학의 회복이라고 했던 자크 마리탱의 주장이 생각났다. 아니, 보다 단순한 것으로는 성아우구스티누스의 격언이 있다. "사랑하라, 그리고 너희가 하고자 하는 것을 하라"

사랑없는 사람들이 사는 곳, 서로를 ㅡ속이고 서로에게 냉담한 곳에서 살다 보면 점점 더 깊이 죽음에 사로 잡히며 미덕 이외에는 어떤 것도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주 경계선을 넘어 미시시피 주에서 앨라배마 주로 ㄹ넘어가면서 나는 공동묘지를 빠져나오는 기분이었다. 




p187

"우리는 아주 온당한 방법으로 권리를 얻어야해요.그리고 저들 역시 과거의 방식을 변화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는 거라고 이해해주려 해요. 우리중에는 백인들 못지않게 변화를 원치 않는 과거의 엉클 톰이 많이 있어요. 


똑똑한 체하는 젊은 사람 중에는 오로지 백인에게 '앙갚음 할'기회만 노리는 사람도 많아요. ... 그들은 미움과 분노로 가득 차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수치지요. 그들 역시 엉클 톰만큼이나 배신자예요."




p219

또한 얼굴에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점도 눈에 띄었다. 쉬고 있을 때에도 얼굴은 전혀 편안해 보이지 않았고 어디에도 마음을 두지 못하는 절망감이 가득했다. 수 많은 남부 흑인의 얼굴에서 보았던 모습이었다. 내 마음도 오랫동안 텅 빈채로 지내는 동안 그런 모습으로 변했다. 마음은 늘 먹을 것과 물 생각이었다. 너무도 오랜 시간을 그저 기다리거나 두려움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데 쓰다 보니 그 밖의 다른 많은 것은 더 이상 생각나지 않앗다. 나와 같은 조건에 처한 다른 사람들처럼 나 역시 삶이 버겁기만 했다. 

흔히 '재미'라고 일컫는, 그저 즐기기 위한 일만 자꾸 생각났다. 심한 갈증과도 같았다. 이런 욕구가 너무 컸기 때문에 마감처리가 되지 않은 나무 벽일지언정 깨끗한 수도가 설치된 화장실 작은 공간에 잠시나마 혼자 있을 수 있는게 기쁘기만 했다. 마음 깊은 곳에 이 삶의 더러움과 굴욕이 깊이 박혀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수도꼭지만 틀면 마음껏 물을 마실 수 있고 시원한 물로 세수하는 사치도 누릴 수 있었다. 문에 빗장을 걸어놓으면 증오의 시선을 받지 않았고, 경멸당하지도 않았다. 




p224

흑인의 행동방침에서 고귀한 존엄성이 느껴지는 만큼 상대적으로 자신들의 불명예스런 행동이 더욱 두드러져 보이기 때문이다. 


백인과 흑인 두 인종이 마치 콘크리트 덩어리처럼 미동도 하지 않을 채 서 있는 것 처럼 느껴졌다. 옳고 그름, 정의와 불의라는 근본 쟁점은 백인들 때문에 가려 보이지 않았고, 어느 편이 이길 것인가 하는 문제로 변질되었다. 




p258

흑인 대학 6개가 위치한 지역- 흑인 금융과 기업이 대략 8,000만 달러를 주무르는 지역의 비슷한 점

: 경제 지도자가 강사나 이사의 자격으로 교육 수준이 높은 학교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 게다가 이들은 지역의 종교적 지도자이기도 했다. 

알렉산더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가 안은게 있다면 그것은 바로 미덕과 권력이 대등한 위치가 되지 않으면 권력이 악용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p259

"공동체에 소속된 모든 사람은 얼마를 가졌든 간에 자기가 가진 것을 다른 사람과 함께 공동출자, 관리한다." 적은 금액을 가진 미미한 세력이 모여 이 돈을 잘 운용한 결과 튼튼한 금융 권력을 이룰 수 있었다. 마침내 은행 두곳을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주택위원회가 흑인이 이 지역에 주택을 구입하는데 동의함. 그러나 대출은 안해줌. 그래서 흑인 지도자가 거댁의 돈을 별도로 마련하여 흑인이 대출할 수 있또록 함. 그러자 백인 대출기관에서 자기가 일을 하기 시작. 


발전하는 공동체라면 응당 교육, 주택, 일자리, 투표가 중요한 문제로 등장한다. 흑인 지도자는 애틀랜타에서 잘 나가는 '성고 계층'으로서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깊은 책임 의식을 지녔다. 주로 의사, 변호사, 교육자, 종교 지도자, 사업가들이었다. 





P297

나를 여전히 반길 줄은 몰랐습니다

아니 뭘, 잘 알면서 그런 소릴 합니까?”

잘 모르겠어요.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ㅂ ㅗ이는지. 사ㅣㄹ 내가 당신 가게에 들어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고 행여 이곳과 거래를 끊으면 어떡하나 걱정했어요

그런 고객이라면 내 쪽에서 먼저 사절입니다

 

  블랙라이크미 발표 이후 가족이 지역의 무관심과 냉대에 맞서고 있을 때 주인공의 아버지가 가게에 들러 주인에게 들은 가장 감동적인 말. 하지만 결국 이들은 괴롭힘을 못이기고 멕시코로 이주하게 되었다. 주인공은 이러한 운동,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수반될 위험으로부터 충분히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에게 피해를 미치는 것에 대해 논의가 되었었던 것일 까? 나는 나 자신이 선택한 길이기에 자신이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면 그것은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나 때문에 의도치 않게 피해를 받게 되는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다면 운동을 지속할 수 있을지. 그리고 그 운동을 지속할 만큼 내가 그 운동에 확신을 가질지 내 운동이 미칠 영향에 대해 분명히 인지 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모르겠다.

 



P300

지역 주민들은 무조건 그냥 이대로 평화롭게 지내기를바랐다. 좋은 생각이긴 하지만 비극적인 일이었다. 나 역시 우리에게 평화로운 삶을 가져다 주려고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정의를 확인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지금과 같은 경우에 평화롭게지내는 것은 결국 모든 평화를 파괴하는 데 동의하는 결과밖에 되지 않는다. 작지만 강한 힘을 가진 집단이 부정을 저지르는데도 이를 그냥 묵인하는 한 결국 사회안정, 진정한 평화, 인간이 동료에게 선의를 가진다는 진정한 신뢰감이 모두 파괴되는 것을 묵인하는 셈이다.

 

 

 

P324

이게 바로 우리가 말했던, 그 이빨이 덜덜거리는 용기라는 거요

 

 


P329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지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지만 이런 현상이 믿을 만한 것은 아니었다. 많은 백인 인권활동가는 미국 흑인이 놓인 현실에 밀착되지 않은 채 활동했다.

 

흑인 인권운동에 동조하는 백인 눈에 모든게 좋게 보였다면 이것은 어디까지나 겉모습이다. 이런 표현 아래에는 전혀 다른 문제가 감춰져있었다. 오래된 절망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희망과 결단이 서서히 자리 잡았다는 것은 이 자체로도 엄청난 발전이긴 했다. 그러나 대다수 흑인이 겪는 일상적인 삶의 문제는 여전히 아무것도 변한게 없었다.

 



P334

백인은 바른 말을 하며 불공평한 현실에 깊은 우려를 표명하고 인종차별 주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단호한 의지를 드러낸다. 그러나 흑인을 동등한 존재로 대하면서 그들과 의논하지는 않는다.

 



P348

아무리 백인이 흑인을 불신의 눈으로 본다고 해도 흑인이 백인을 엄청난 불신의 눈으로 보는 것에 비하면 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P351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할까? 흑인 지도자와 사상가는 뒤로 한걸음 물러나 상황을 다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가혹했다. 오래된 꿈, 한 가지 해결책을 향한 변함없는 희망, 다시 말해 통합된 사회를 이루기 위한 희망이 이제껏 별 효과가 없었고 앞으로도 실효를 거둘 가능성이 없다는 결론이었다. 흑인은 흑인 거주 지역 안에 비좁게 틀어박혀 계속 그곳에 머물러야 했다. 이제껏 발전을 이루었지만 이는 겉모습만 변한 것일 뿐, 이 땅의 흑인 거주 지역 내에서 이뤄지는 삶의 문제는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흑인은 여전히 인간으로서,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자기 결정력과 자기 존중의식을 가진 인간 개인으로서 제대로 살아갈 수 없었다. 희망을 쌓아올렸다가 다시 백인 사회의 분위기에 무참히 꺾여 버리는 악순환, 심신을 고단하게 하고 폭력적이기 까지 한 이 악순환을 끝낼 수 있는 대안은 무엇일까?

흑인 지도자들은 곰곰이 생각했다. 얼핏 희망이 없어 보이는 상황을 유리한 상황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새로운 정신을 찾아야 했다. 우선 첫걸음은 실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ㅇ이고 이런 현실을 바꾸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었다. 인종정의는 단지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모든 사회를 위한 것이라는 깨달음을 모든 사람이 얻을 것이라는, 먼 미래의 애매한 꿈 따위에 더 이상 매달리지 않기로 했다

이러한 시각에서 문제를 바라보자 몇 가지 놀라운 사실이 뚜렷하게 보이지 시작했다. 과거의 꿈을 버린 흑인 사상가는 체제 속에 배어 있는 약점을 끄집어내기 시작했따. 이 약점 중 맨 먼저 언급된 것은 철학자가 말하는 이른바 분열된 개성이었다. 이런 약점을 규정하는 순간 흑인은 곧바로 이를 이해하고 깨달았다. 분열된 개성이란 이 사회에서 뭔가를 이루려고 노력하는 흑인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흑인은 성공하기 위해 백인을 모방해야했다. 백인처럼 옷을 입고, 백인처럼 말하며, 백인처럼 생각하고, 백인 중산층 문화의 가치를 표현해야 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자아, 흑인 존재, 흑인 문화를 수치스러운 것처럼 숨기고 부정하는 것을 의미했다. 성공을 이룬 사람은 소외된 주변인이 되엇다. 흑인 문화의 장점으로 부터도, 동료 흑인으로부터도 소외되었고, 그의 얼굴에 드러한 색소 때문에 백인으로부터도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 취급을 당하고 결코 가짜 백인 노릇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분열된 개성이라는 용어를 이해하는 순간, 이 말이 의미하는 미묘한 차이까지 모두 느끼며 살아왔던 흑인은 그 의미를 완벽히 이해했다.

 

분열된 개성의 단점을 역으로 바꾸기 위해 흑인의 역사를 연구하고, 흑인의 자존심을 개발하며 심지어는 예전까지 억압적이었던 의미를 지녔던 블랙black’이란 단어도 사용하고, 이런 말들이 뉴 블랙new black’의 상징어가 되고 아름다운 말로 들릴 때까지 지속적으로 머릿속에 박히도록 했다.

흑인 사상가는 흑인 거주 지역을 정원으로 바꾸고, 흑인 학교를 인수하며 나라 안에 나라를 세우자는 주장을 했다.

흑인 사상가는 기존 체제의 경제적 문제점을 지적했다. 흑인 구역 내에 있는 사업체는 대개 백인 소유며, 특히 대형 체인 잡화점이 많았다. 흑인이 이런 가게에서 돈을 지출하면 이윤이 백인 은행으로 들어갔다. 백인 은행은 텔레비전이나 자동차 대출금을 얻는 데는 흑인을 차별하지 않지만 소규모 사업이나 주택 대출에서는 차별을 하기 때문에 결국 흑인의 돈이 힘을 잃게 된다고 널리 알렸다. 이런 상황을 이해한 시카고 거주 흑인들은 백인소유의 대형 체인 상점을 돌아다니면서, 앞으로 흑인에게 상추 한 잎이라도 파고자 한다면 반드시 흑인을 상점 직원으로 고용하고 관리직에도 흑인을 포함시켜야 한다는 취지의 주장을 전했다. 상점은 이에 응해야 했다. 이 운동은 큰 성공을 거두어 여기서 사용된 기법이 전국적으로 퍼졌다.

보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흑인 사회 전체가 나서서 흑인 남자 아이를 구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왔다. 그러자 순식간에 모든 사람들이 이를 깨닫게 되었다. 이전까지 늘 흑인 여자 아이에게는 관심을 기울여왔다. 이제는 흑인 남자아이에게 관심이 돌아가면서, 백인 교과서를 사용하는 흑인 학교에서 흑인 남자아이는 역사 속 의 모든 영웅이 백인이라는 결론을 너무 쉽게 받아들인다는 사실이 지적되었다.

백인이 흑인 손을 잡고 흑인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이끄는 과거의 풍경은 흑인 남자 아이에게 성인 흑인 남자는 별로 닮고 싶지 ㅇ낳은 인물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또한 아이의 영혼을 죽이고, 문제해결능력을 가진 개인으로서 성인이 되고 싶은 의지마저 꺾었다. 이러한 자각이 온 나라를 휩쓸었다. 흑인 부모는 교과서를 바꿔달라고 요구하기 시작했고, 흑인과 관련된 모든 문제의 해결과정에 흑인이 참여하는 모습을 시각적으로 넣어달라고 요구했다.

 

흑인 대학에도 흑인 강사 늘려달라고 요구함


 자기 결정력을 가진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한 가장 중요한 자각.나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이고, 나를 받아들이고 사랑해가는 과정 속에서 자기 자신과 자신이 속한 사회를 보는 것. New black의 탄생은 위대하다. 


신인종주의 담론에 있어서, 왜 한국에서 이러한 차별현상이 일어나는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이어가게 되었다. 우리 문화와 전통을 지킨다는 것에 의미가 무엇인지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러한 성찰이 없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되었다. 흑인이 자신을 백인화 시켜가는 과정에서 흑인 자기 자신을 바라보게 되었던 것처럼,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이해하는데에 있어 문화(언어, 인종, 사회규범, 사상 등)는 '힌트'가 될 뿐이지, 절대적인 답이 될 수 없다. 문화가 자기 자신인 사람들은 그 안에 다양성이 없다. 문화 속에서도 다양한 개인이 서 있을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이 그 문화가 아니라, 그 문화 속의 독특한 자기 자신이라는 점을 아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며칠 전 지젝의 강의에서 자본주의화 되어 있는 개인을 설명하던 이야기들이 생각났다. 한 개인이 부를 축적하기 위해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희생한다. 그 희생은 자기가 생각하는 중요한 가치에 기반 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문제를 야기하는 것 같지 않다. 그리고 그것만을 보고 걸어가기 쉽다. 그러나 사실 그러한 부의 추구가 전체의 관점에서는 누군가/어떤존재에게는 해가 될 수 있다. 

역사적 과정에서도 종교와 애국주의 같은 사상과 같은 '선한'의도를 가진 것들이 그러한 것에 이용되었다.


차별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외국인의 유입이 한국 고유의 문화를 흐트려 놓는다는 발언은 문화가 자신이라는 생각에 기인하는 것 같다. 즉 한국의 인종차별은 어쩌면 우리가 자기 자신을 너무 모르는 것에서 기반이 되는 것이 아닐까. 어느 순간 부터 '전통'을 지키자고 했던 이야기들이 왜곡되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 또는 차별을 정당화 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러한 것들을 비판적으로 보기 힘들고, 아 그래! 지켜야해! 라고 생각하기 쉬운 것이 아닐까. 이것은 중요한 문화를 지키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왜 지켜야 하는지에 대한 자기 자신의 온전한 이야기들이 부재한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강기 든다. 일제 침략의 과정에서 민족주의 담론-종족적 민족주의-가 생길 수 밖에 없었던 역사적 사실은 이해가 되지만 이후 어쩌면 보이지 않는 잠식 -보이지 않는 식민지배-에 대한 두려움이 잔재해 있어 이에 대한 반증으로 외국인 혐오증이 나오는 것일까?


하지만 그 혐오증, 신인종주의의 대상이 사실 실제로 보이지 않는 식민지배를 행한다고 할 수 있는 대상자 들이라기 보단, 그와는 전혀 상관없는 오히려 우리가 보이지 않는 식민지배를 하고 있는 국가들의 출신 또는 인종에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한 두려움의 실체가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것이 아님이 설득이 되어간다. 



 

P357

과거에는 다수의 정서라는 아주 취약하고 쉽게 사라지는 정서를 바탕으로 희망을 꿈꿨지만 이제 그런 허약한 기반은 사라지고, 그 대신 매우 거칠고 모순으로 가득차있긴 하지만 현실주의가 그 자리에 들어서서 보다 단단한 기반 구실을 할 것이다. 흑인은 완전한 인간으로, 자기 결정력을 가진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 앞으로도 계속 전진할 것이다.


 

P365

오랫동안 내 안에 들어 있던 감정의 찌꺼기들, 편견, 부정, 수치심, 죄의식은 타자가 결코 다른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모두 씻겨 나갔다.

 

우리가 서로 진심 어린 대화를 나누기 전에 먼저 머리로 인식하고 그런 다음 마음속 깊이 감정적인 차원에서 깨달아야 하는 것이 있다. 바로 타자는 없다는 것, ‘타자란 중요한 본질적 면에서 바로 우리 자신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타자가 나와 같다는 부분에 대해 이견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가 부재할 경우에 문제는 발생하는데, 이러한 타자 또한 내가 함께 공존해 가고 있는 타자이며, 이들과 나는 분명히 공감할 수 없는 어떤 지점이 있는 것이다. 타자는 나를 비춰주는 거울이고, 어떠한 타자와 함께 하느냐에 따라 나의 모습도 달라지는 부분이 명확히 있다. 나는 결국 그 본질적인 의미에서 같음이 너무나 명백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 심지어 사후세계는 결국 무아일체의 형태일 것이다 라고 즉 나로 존재하며 나와 타자가 완벽히 일치하는 상태- 이야기 하기도 했다.


 타자가 없고, 타자는 중요한 본질적 면에서 바로 우리 자신일 뿐이라는 말에서 오히려 폭력성이 내재되어 있을 수도 있는데, (물론 이 사람이 어떠한 맥락에서 이야기했는지를 알기 때문에 사실 중요한 것은 타자가 있다 없다. 타자가 무엇이다 라는 이야기보다 그것을 이용하여 전한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것을 자각하기까지 각자의 역사는 다 다르고, 생각이 너무나 다양하기 때문이다. 어떨 때는 나 자신의 존재를 위협할 만한 존재 실로 나를 위협하거나, 나와 너무나 상반되는 가치관으로 인해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는- 로 인하여 ...........(쓰다가 정지)



 

P396

나는 차츰 인종화합과 관련된 공적 인물로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게 되었다. 백인이 흑인 말에 귀 기울이지 않던 시절에 한때는 몇몇 백인이 나서 정의와 인종 간의 대화를 주장해야 했다. 그러나 그런 시대는 지나갔다. 흑인이 완벽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때에 백인이 나서서 흑인을 대변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현재 한국은 어떠한 때인가를 논의함에 있어서 난센에 오는 많은 난민신청자들의 특징을 이야기하자면... 우선 난민이 한국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냄으로써 자기 정체성을 찾는 사람이 있고, (왜냐하면 그러한 활동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왔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엄밀히 이야기해서 한국의 상황에 대한 문제를 지적하기에는 아직까지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때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또 공통적으로, 난민의 상황을 자신이 야기한 부분-자기자신으로 있고자 하는 자신의 의지-에 있어서의 자발적 선택과, 그것을 지키는 과정에서의 강제 이주-자발적 선택의 부재-가 공존하기 때문에, 신청과정에서 자신의 상황을 잘 받았들였다기 보다는 그 두가지 사이에서 혼란스러워 하는 부분도 있는 것 같다. 이는 자기 자신의 과거의 경험과 현재를 이해해 가는 과정으로 보며, 개인차가 있겠지만 대부분 난민신청 초기에는 그 과도기에 있는 분들이 많다고 생각한다.

또한 난민신청 이후 전혀 보장되지 않은 결과 -내가 이곳에 살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라는 전제 또한 또 하나의 불안 요소로 작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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