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 렁 이 의 길/탐 구

제작일지 첫번째

두치고 2022. 1. 2. 21:58

함께 맞는 비라는 다큐멘터리를 만든 이수경 감독, 수경님의 제작일지를 다 읽었다.
총 82편이 되는 글로 3~4년에 걸친 제작의 과정들이 하나하나의 고민과 땀들이 녹아 있는 소중한 글들이었다.
수경님의 글을 읽으며 나도 제작일지를 썼다면 어떘을까 싶다.

다큐멘터리 제작 과정에서
어디에 말할수는 없지만 내 머릿속으로 정리되지 않았던 숱한 번뇌들 그것들을 기록했더라면
내 첫번쨰 다큐가 조금은 달랐을까?
아마 다큐를 만드는 것 자체만으로도 벅차서 제작일지를 대체로 쓰지 못했을 거다.
그럼에도 제작일지를 지금이라도 써놓고 싶다.
언젠가 내가 다시 다큐멘터리를 진지하게 배우고 만들어보고 싶다고 생각했을떄
언젠가 내가 <보리>를 완성해야겠다 결심히 섰을때
이 글이 어떤 의미가 있는 기록으로 남을 수 있다면 좋겠다.

1. 21년 12월. 미디액트 사회적다큐멘터리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라는 수업의 일환으로 단편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종로 인디스페이스에서 상영회를 했다. 내가 만든 영상이어도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서 다큐를 보지 못할 정도로 나는 미완의 다큐멘터리를 상영했다.
실은 이 다큐멘터리의 의미를, 보리와의 만남을, 내 삶에서 여전히 정리해내지 못했다는 말에 가깝다고 볼 수 있겠다.

2. 이런 상황에서 내 인생에 앞으로 <보리>를 완성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일단 호기롭게 시작을 하긴 했지만 만드는 과정에서 끝없이 이 과정을 포기하려고 했다.
이게 정말 보리에게 보리를 둘러싼 관계들에 도움이 되는지 확답을 내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3. 다큐멘터리는 이런 측면에서 극영화와는 다르다. 다큐멘터리 속 주인공들은 오늘도 여전히 삶을 살아가고 있는 실존하는 존재들이고 그들을 둘러싼 관계와 환경들은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기에 이런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내가 만드는 다큐멘터리의 의미가 도대체 무엇인지 다시 질문할 수 밖에 없고 고려해야할 부분들이 너무 많고 그것만으로도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다. 그래서 <보리> 또한 실상 내가 포기했다는 것에 가깝다 할 수 있겠다.

4. 처음엔 그저 보리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보리가 고통스러워하고 크게 오랫동안 우는 소리를 듣는게 괴로웠다. 보리가 병에 걸리고 보리가 힘들어하는 것들을 해결해 주고 싶었고, 보리를 둘러싼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했지만 결코 변화할 수 없는 거대한 장벽을 마주하게 됐다. 내 제안들을 조롱거리, 웃음거리, 천덕꾸러기로 치부하는 상황은 견딜 수 있었다. 그런데 여전히 보리가 그렇게 살아야하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보리의 삶을 조금더 가까이서 보여주면 이들의 생각이 바뀔까. 그렇게 촬영을 시작했던 것 같다.

5. 첨부터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촬영해서 편집을 하면 되겠지하며 아무런 기획안 없이 촬영해낸 영상들은 편집 과정에서 영상의 내용이 대체로 사건 중심적이고 진짜 내가 전하려는 보리의 삶은 그 과정이 잘 드러나지 않음을 알게 됐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이미 촬영에 담고자 하는 보리의 삶 이전에 나와 보리의 관계가 형성됐고 그로 인해 많은 부분이 보리가 해결이 된 것 처럼 마치 아무일 없이 잘지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없을떄 누군가 보리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보리의 의사소통의 수취인이 대어줄 누군가가 없을땐 보리는 다시 처음 내가 봤던 보리의 모습 그대로 있을 것이다. 그럼 나는 처음의 보리를 영상에 담기 위해 보리와의 관계를 끊어야하는가. 그것이 마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 위한 목적으로 보리를 이용하고 연출하는 것 같은 윤리적인 문제와 고민의식으로 연결되며 본래 취지의 ‘나를 덜어낸, 보리의 삶을 자세히 그대로 담아내는 작업’을 할 수 없게 되는 지점이 되ㅓㅇㅆ다.

6. 그럼 결국 나와의 관계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보리의 문제를 그들에게 전달해야할 것인가. 여기서부터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봉착하게 된다. 나는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이 되고, 보리의 문제를 방조한 이들은 그들이 될떄 이건 보리의 환경을 비로소 바꿔내는 데 이용되는 다큐멘터리라는 목적을 상실하게 된다. 왜냐면 결국 ㄴㅏ에게 중요한 관객은 보리를 둘러싼 사람들, 보리를 실질적으로, 일상적으로 케어하고 돌보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7. 그럼 나는 보리가 처한 문제의 상황의 원인이 그들이라는 1차원 적이고 재미없는 접근보다 이 문제가 발생하게된 더 근본적인 원인 더 깊은 부분의 무엇을 건들여야 한다

8. 쥐의 문제에 대해 다시 생각해봤다. 공양간에 쥐가 많아지게 된 원인은 음식물 쓰레기가 많기 때문일 것이고. 음식물 쓰레기를 공양간 주변에버렸기 떄문이다. 그런데 공양주 보살님은 올해 여든이시다. 이미 불가능한 재생산 노동을 말도안되는 보수를 받아 버텨오시고 계시다. 그런데 매일 밤마다 쥐가나 타나 잠을 자지 못한다. 그래서 고양이가 필요했다. 이게 공양주 보살님의 탓이 아니다. 여성의 재생산 노동, 절에서 공양주 보살에대해 당연히 생각하는 노동 착취, 이 절 자체가 운영이 어려울 수 밖에 없었고 그런 길을 일부러 선택했던 배경들. 활동가들의 쉼을 위해 후원받는 구조이지만 충분하지 않은 보수. 그 공간을 이용하고 있는나. 결국 나도 이 시스템에 공모하고 있다. 이 부분을 함꼐 가야한다.

9. 쉼터 위원장에게 공양주 보살님의 노동을 단축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쉼터 위원장은 변명만 늘어놓으며 이후에 다른식으로 비아냥을 해댔다. 쉼더 위원장 또한 거의 보수를 받지 않고 이 쉼터를 운영하고 만들어왔다. 자기가 다쳐도 병원에도 제대로 가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잘 챙기지 않아 큰 병에걸리기도 했다. 그렇게 전 동료가 떠나가기도 했다. 개를 한마리 키우고 있는데 딱 그 개가 그 역사 그대로 살고 있다. 죽을 고비를 넘기는 개를 병원에 데려간 것은 결국 주인인 쉼터위원장이 아닌 쉼터이용자인 해바라기 선생님이었다. 자기 자신의 건강을 못돌보니 당연히 동료의 건강, 고생, 노동에 관심이 있을리가 없다. 여성의 재생산 노동에 대한 감수성이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10.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 구조의 문제로 보자. 그 사람이 그렇게 행동하는데는 내가 알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그러니 여성의 노동을 착취하고 가부장적이고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중년 남성들이 이해되지 않더라도 그들을 비난하거나 미워하지 말자. 개인들과 대화할 수 없다면 가부장제랑 싸워야하는건가. 그래서 뭐 결국 보리의 상황이 실질적으로 바껴야하는건데-_-

11. 보리의 삶만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하는 촬영본. 한달을 넘게 그 영상들을 어떻게든 이어붙이려고 했는데 영상 언어에 대한 이해도 부족하고, 시퀀스의 연결, 흐름, 구성 이런 아예 기본 상식 자체가 없다. 사운드에 대한 이해도없고 아니 총체적 난국이ㅏㄷ. 구성을 백만번 천천히 노트에 적어봐도 도저히 모르겠다. 나는 진짜 개뿔도 모르면서 다큐를 만든다고 하네. 구성을 도대체 어떻게 구성해야하는거지? 일단 영상을 감독님 말씀하신 것 처럼 쭈루루 붙여보기를 하자.

12. 영상을 붙여보니 더 총체적 난국이다. 일단 구상을 다시 짜야한다. 일단은 완성을 해낸다는 것에 집중을 하니 어쩔 수 없이 내 목소리와 내 해석이 들어간 다큐로 변질되는 과정이 탐탁치 않았다. 다큐의 본래 목적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12. 그럼에도 이 다큐가 만들어져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결국 동물을 착취하는 구조의 문제라고 봐야하지 않을까. 동물과 식물, 곤충들이 어떻게 서로 관계맺고 있는지. 하지만 나를 비롯한 인간들은 어떻게 그들을 이용하는지를 드러내야하는가. 여전히 6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처음 이 다큐를 만들며 이 다큐를 봐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대상이 아예 예상 관객 리스트에서 사라져버리게 됐다. 그래서 도대체 이 다큐가 무슨 소용인데?

13. 그런데 다큐를 만들게되며 내가 더 깊이 고민할 수 있었던 지점들 때문에, 나는 이 문제로 더 적극적으로 절 사람들과 이야기하게 됐고
보리가 비로소 공양간 안에서 잠잘 수 있게 됐다. 뭔가 작은 승리를 한 것 같은 기분이다. 문제는 보리가 이미 나와 살았던 집에 길들여져 공양간에서 내려온다는것. 내가 보리를 돌보며 공양주 보살님이 쥐 때문에 잠을 못자고 몸이 안좋아 지는 상황에서의 분열. 내가 보리 곁에있는 순간 결국 또 다른 절에서 착취 당하고 있는 사람이 그 직격타를 맞게 되는 이 공황을
매일 외면하려고 애썼지만 결국 실패했다. 보리가 공양간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2주 동안 서울에올라가 있었다.

14. 2주 뒤에 절에 돌아왔지만 보리는 여전히 크게 울며 사람들을 쫓아다니고 있었다. 그 상황은 적잖은 충격이었다.
이제 안에서도 잘 수 있게 됐는데. 보리는 무엇이 문제인걸까.
아니나 다를까 노보살님이 보리가 방 안에서 문을 열어달라고 했는데 문을 열어주지 않아 공양간 안에 대변을 보게 됬고 그걸로 많이 혼을 낸 것 같았다.
주말이면 좁은 창고안에 가둬두고 물도 없이 이틀을 넘는 시간동안 지내게 하는 것 같았다. 하..................... 진짜

15. 여러번 거듭된 보리 문제 해결 과정에서 나는 이미 사람들을 신뢰하지 못하게 된 것 같다. 무엇이 맞는걸까. 아 ㅅㅂ 모르겠다 그냥 다 폭로해버리겠다 더이상 고민안하겠다 그냥 일단 끝가지 만들기나 하자.

16. 그렇기 때문에 그 누구도 초대할 수 없었다. 그 누구에게도 이 정리되지 않는 이야기를 들려줄 수 없었다. 나는 실패했고, 다큐멘터리를 만들여 보리를 등한시 했던 시간들. 보리가 무료해하고 같이 놀자고 말 걸었을때 미안하다고 반복하며 말했던 시간들 도대체 왜 이렇게 아무 의미도 없는 다큐를 만들어 보리에게 오히려 집중도 하지 못했나 자괴감이 들었다

17. 결국 내가 나갔으면 좋겠다는 의미의 말을 공양주 보살님이 했고. 나는 보리를 두고 오게 됐다. 보리에게 마지막날 계속 차에 타자. 나랑 같이 가자고 했다. 보리에게 간식을 주며 보리를 데려가는 것은 납치니까. 보리가 원하면 차에 탈 수 있게 며칠전 부터 차 문을 활짝 열어두며 살았다. 하지만 결국 그 짧은 시간동안 나는 보리를 케어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 천혜자연에서 자유롭게 사는 보리가 행복하기도 하다는 것을 조금은 알 것 같아서. 나는 그런 곳에서 살 수 없고 좁아터진 집에서 창문 밖을 바라만보는 그런 집사를 기다리기만 하는 그런 고양이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내가 보리와 헤어지기 힘들어서 보리를 데려갈 순 없는 것이다. 나는 보리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이었다.

18. 나는 결국 보리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보리의 분리불안을 더 자극했고 보리를 지키지 못했고 보리를 행복하게 할 수 없는 사람이다.

19. 내가 돈을 모아 보리와 함께 살 수 있는 마당이 있는, 집 뒤에는 생명들이 요동하는 숲이 있는 그런 곳에 집을 산다면 언젠가 꼭 보리와 함께 살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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